내 엉덩이에 닿은 낯선 손바닥

침묵하지 않길, 대신 행동하길

by 안녕씨

정작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안 좋은 일은 늘 예고 없이 등장한다.


'슬슬 숙소로 들어가 볼까'하고 버스 정거장을 향해 걷던 중이었다. 낯선 손바닥이 내 엉덩이를 빠르게 움켜쥐고선 사라졌다. 정말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다. 당황한 마음을 달랠 여유도 없이 자동반사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30m가량 떨어진 곳에 스무 살 안팎의 남자아이 네댓 명 킥킥 거리는 게 보였다. 미안한 기색도, 반성의 기미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있는 힘껏 얼굴을 구겨 내 감정을 오롯이 드러냈다. 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째려봤다. 하지만 그들은 이 상황이 마냥 웃기다는 듯 깔깔대고 있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아주 불쾌했다. 시계를 봤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해가 조금씩 저물어 가는 시각이라 거리는 약간 붉은 색조를 띠고 있었지만 칠흑 같은 어둠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내 갈 길을 가기로 했다. 왜냐면 한 시라도 빨리 안전한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점점 속도가 붙는 걸음을 바삐 걸어가면서 나는 길어야 2분 남짓의 그 일을 꼽씹어 봤다. 아니,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메인은 사후처리였다.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이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준였는데, 나는 과연 잘 처리했나였다.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째려보고, 인상을 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을 할 순 없었을까. 그 자리를 피하면서 상황을 모면하는 선택 말고 다른 선택은 할 수 없었을까. 였다.

핑계일 수도 있지만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였고, 이곳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데다 지리도 낯선 스리랑카 갈레 Galle라는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베스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숙소로 돌아와 대처법을 검색했다. 다음번에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에는 적어도 오늘처럼 무기력하게 가해자들이 일말의 죄책감 없이 피해자 앞에서 웃는 일은 만들지 말자는 반성과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려면 피해자가 번거롭더라도 아니 겁이 나더라도 그 자리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약간의 정의로움이 작용했다. 그렇게 찾은 대처법은 한국과 동일했다. 그건 경찰에 신고하는 일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에 있어서 만약 두 글자는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미래를 위해 시계를 거꾸로 돌려봤다.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멈춰 서서 째려보는 대신 사진기로 범인들의 인상착의를 증거로 남겼더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경찰서를 검색한 후 경찰서로 가서 신고를 했더라면 하는 상상. 뭐, 손이 후들후들 떨릴 수는 있겠지만 실현 불가능한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물론 그렇게 했을 경우, 카메라가 망가지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상황은 무조건 피하라고 강하게 주장해보겠다. 모순일까. )




언젠가 읽은 여행기가 오버랩된다. 스리랑카에서 멀지 않은 인도를 여행하며 겪은 에피소드였다. 저자는 여자였는데, 그렇게 인도 남자들이 가슴을 만지고 제 갈길을 가더란다. 그날도 추행을 당했는데, 마침 경찰이 근처에 있길래,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바로 달려왔고, 현행범을 바로 그 자리에서 처벌받았다. 경찰봉(?)이 사정없이 가해자를 가격했다고. 덧붙이면 신고자가 불편할 만큼 무지막지한 몽둥이질이었다고 했다.

그 사건이 있은 후에도, 추행은 이어졌지만 저자는 가해자를 차마 신고할 수 없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왜 이 스토리가 떠오른 걸까.

내가 그래도 저자보다 나은 상황이라고 위로받고 싶은 걸까. 별일 아니니 훌훌 털어버리고 지금에 충실하라는 방어 기제 같은 걸까




또 다른 상황도 소개하고 싶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한 장면이다. 무리를 지어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던 주인공(줄리아 로버츠)과 친구들이 추행을 당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그 중 한 명이. 근데 그 다음 행동이 꽤 인상적이다. 왜냐면 남자를 포함 모두가 연대를 하기 때문이다. 주저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자리에서 바로, 큰소리와 큰 제스처로, 한 목소리로 성추행범에게 욕을 퍼부었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탓일까. 그 장면은 꽤 통쾌했다.





이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혹시나 이와 같은 일을 겪게 된다면 행동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적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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