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늘 아래서 날 지켜보던 가이드가 헐레벌떡 달려와선, 내 발등을 보고는 어디론가 달려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소독약과 붕대가 있었다. 나는 따끔거리는 아픔을 맛보며 상처 위에 소독약이 발라지고, 붕대가 감기는 것을 바라봤다. 너무 놀라고, 무서우면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왜 오토바이를 배우겠다고 했을까. 후회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퇴근길 러시아워가 숙제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곤란했던 것 중 하나는 길 건너는 일이었다. 신호등이 따로 없으니까 눈치껏 건너야 하는데, 유유자적 평온한 표정으로 건너는 현지인과 달리 나는 도통 건널 수가 없었다. 특히 러시아워의 혼잡한 도로는 큰 스트레스였다. 그렇게 길 건너느라 고군분투하는 나에게 서양 여행자들은 공감의 미소를 찡긋 보여주고 지나갔는데, 나만 겪는 어려움이 아니구나 싶어서 위로가 됐다. 그렇게 오토바이에 오르긴 커녕, 길 건너는 일만이라도 좀 수월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다 서양 할머니가 지나가는 오토바이에게 “나 건너갈게”라고 호통(?)치는 걸 보게 됐다. 관심을 두니,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운전자와 눈을 마주치는 일 그 쉬운 일이 카오스 같은 동남아 도로를 통과하는 프리패스임을 알게 됐다. 그렇게 조금씩 동남아의 룰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바이는 내게 너무나 멀고 먼 그대였다.
호이안까지 오토바이 타고 가지 않을래?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가 비무장지대 DMZ라고 한다. 그 비무장지대를 한국에선 안 가보고, (사실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못 했다) 베트남에서 찾았다. 그 투어에서 독일인 스테판을 만났다. 서른 즈음의 엔지니어, 그리고 1년간 세계 여행을 할 계획인 아이였다. 그가 후에 Hue에서 호이안 Hoian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예약한 업체를 알려줬다. 후에에서 짐을 별도로 호이안으로 보내고, 홀가뿐한 상태로 손수 오토바이를 몰면서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추며 호이안까지 관광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가격은 30달러. 오토바이만 탈 수 있다면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타본 적도 없거니와, 오토바이는 목숨 걸고 타는 위험천만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 여자에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나' 오토바이 타고 호이안까지 갈 수 있을까?
상담을 원하는 나에게 점원은 “호이안에 도착해서 오토바이를 반납하고, 짐을 찾으면 돼”라며 장점을 늘어놨다. 그러면서 오토바이를 고르라고 했다. 나는 산으로 가는 상담을 멈추고, 날 주저하는 만드는 내 상황을 설명하기로 했다. "오토바이를 탄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호이안까지 갈 수 있을까?" 점원은 가게 앞 골목에서 오토바이 타는 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의 가르침대로 오토바이를 몰아봤다. 손잡이로 속도를 조절하는 미세함이 어려웠다. 자꾸 급출발, 급제동을 하게 됐다. 도로 사정에 대해 물었다. 경사로가 있는 길이라는 했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 투어를 포기했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컸지만, 목숨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테판이 떠나고, 함께 다녔던 여행 작가도 그 쯤 한국으로 돌아갔다. 혼자 온 여행이었다. 근데 갑자기 진짜 혼자가 되어 버렸다. 허전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김광석의 노래가 자꾸 재생됐다. 매일 이별하는 이별의 단맛, 쓴맛, 신맛을 맛보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제대로 배워보기로 했다
그렇게 혼자가 되어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전날 투어를 함께 한 가이드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오늘 계획은 뭐니?”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오토바이 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동남아를 휘황찬란하게 질주하려는 거창한 의도가 아니라, 적어도 생존 전략으로 타는 법 정도는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았다.
우린 근처 공원으로 이동했다. 평일의 오전 시간이었다. 한쪽에 퍼퓸 강이 흐르고 있는 공원은 한산했다. 그는 오토바이 조작법을 알려줬다. 그리고 연습 삼아 공원을 돌아보라고 했다. 처음엔 아주 느낀 속도로 공원을 돌았다. 한 번 돌고, 두 번 돌고, 거듭 도니까 적응이 됐다. 할 만했다. 거기에 그늘 아래서 날 지켜보던 가이드가 잘 탄다며 엄지 척을 허공에 자꾸 날려주니까, 진짜 잘한다고 착각하게 됐다.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속도를 점점 높이게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우회전을 시도하다 덜컥 겁이 난 내가 뒤늦게 속도를 줄이려고 하다 난 사고였다. 오토바이 배우기는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미얀마 바간, 전기 바이크 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오토바이를 두려워하며 한 동안 멀리 하고 있었다. 근데 미얀마 바간에서 오토바이를 정확히는 전기 바이크를 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겁이 났다. 내가 생각보다 삶에 대한 집착이 크구나, 나는 전기 바이크 앞에서 깨달았다. 현지인은 그들의 평범한 교통수단을 두고, 유난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한국 여자에게 연신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피의 맛을 본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바이크를 타보기로 했다. 아니 선택지가 그뿐이었다. 사고를 대비해 최고 속력을 제한해 놓았고, 바간의 도로 상황도 초보자에게 위협이 될만한 상황은 없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그러면서 발등의 상처를 보며 조심 또 조심을 외쳤다. 그렇게 이틀을 전기 바이크로 바간을 누비고 다녔다. 무더운 동남아 날씨, 페달을 밟지 않아도 되니까 몸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또 속도를 제한해놓았다고 해도 자전거의 속도에 익숙한 나에겐 빨랐다. 짐 수납도 편리했다. 한 마디로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맛볼 수 있었던 일등공신은 단연 전기 바이크였다.
피를 본 게 과연 실패일까.
비록 피를 보며, 일단락이 났지만 그때 퍼퓸 강에서 오토바이를 배운 것에 대해선 일말의 후회도 없다. 그때 얻은 상처 덕에 자전거 탈 때도 안전을 그 무엇보다 지향하며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으니까. 또 바간에서의 추억도 예쁘게 쌓을 수 있었다. 또 드물지만 “어쩌다 난 상처예요?”라고 묻는 분들께 “오토바이를 타다가”라고 말꼬리를 흘려주는 재미도 솔솔하다. 소싯적 논 것(?) 같은 거친 여자가 된 기분이랄까. 바간 이후로 나는 오토바이를 운전한 적은 없지만 이런 상상을 펼쳐보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희끈희끈 보일 때 한적한 시골에서 스쿠터를 몰고 다니는 노후 생활, 핑크색 스쿠터를 모는 고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지금은 대단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고, 대단한 여행을 한 것도 아니지만 핑크색 스쿠터를 모는 할머니가 되면 조금은 내 이야기가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