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관념에서 '잠시'이탈했습니다

스리랑카의 만수르

by 안녕씨



반다라나 아이크 공항 Bandaranaike International Airport에서 숙소까지 택시비 10달러, 14,500루피를 낸 줄 알았다. 심플하게 1루피는 1원이라고 계산했다. 그리고 이 부주의한 실수는 아주 '잠시'였지만 가진 자의 행복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모처럼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전날 비행기를 놓친 덕분이었다. 더 정확히는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의 27시간 노숙 덕분이었다. 내 몸을 누일 폭신한 침대와 덮고 잘 이불, 그리고 씻을 곳, 노숙의 체험은 내가 공기처럼 아무렇지 않게 누리고 있는 일상의 감사함을 하나하나 일깨워줬다.


조식 메뉴였다. 특별할 것 없는 토스트와 모닝커피. 거기에 테라스의 의자와 책 한 권이 더해지니, 더 바랄 게 없었다. 최악을 막 지나친 자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거랄까. 새소리가 간간이 들렸고,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도 경쾌하면서도 정겨웠다. 빈둥대는 달콤함을 제대로 누리고 있었다.

뭐든, 적당해야 한다. 지루해지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리셉션에 툭툭 Tuck Tuck을 요청했다. 그리고 시내로 나갔다. 툭툭 비용은 300루피였다. '300원이 바가지라면 기꺼이 감수하자, 가 됐다. 푼돈 때문에 내 감정이 상하는 게 더 손해라는 깨달음에 이른 걸지도 모르겠다. 동남아에서 그래도 두 달, 최상의 추구가 아닌, 덜 스트레스받을 수 있는 방법을 내 나름대로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기사님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바닷가에 도착했다. 짠내가 물씬 풍겨오는 바다의 내음에 기분이 또다시 좋아졌다. 데이트 중인 현지인, 비키니 차림으로 태닝 중인 여행자, 조깅 중인 서양인을 지나쳤다. 같은 장소지만 그곳에서 쌓는 경험이 참 다르구나, 했다. 다른 문화권에서 각자의 시간을 쌓아온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발에 닿는 모래의 촉감을 느끼며, 탁 트인 바다를 바라봤다. 다 좋았다.


그때 현지인 두 명이 다가왔다. 그들은 배 투어를 제안했다. 흥정이 시작됐다. 4000루피를 부르는 그들, 나는 1500루피로 가격을 낮췄다. 절반 이상 깎은 내 협상 능력에 흐뭇해하면서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속도를 내는 배, 그 속도에 비례해 내 얼굴에 닿는 바람이 참 청량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더 기뻤던 건, 내가 결제할 금액이었다. 떡볶이 1인분 가격으로 이런 경험이 가능하다니, 감격스러웠다. 황송했다.


그렇게 투어를 마치고, 육지로 나왔다. 배가 고팠다. 툭툭 기사에게 추천받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로컬을 추천해달라고 했지만, 원한다고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메뉴판을 쭉 살펴봤다. 스테이크가 850루피 밖에 안 했다. 주문해 보기로 했다. 평소라면 1 음료였겠지만, 라임 주스에 내친김에 수박 주스까지 사치(?)를 부렸다. 총 1600루피가 나왔다. 진짜 싸네, 감탄하며 기분 좋게 가게를 나왔다.


길을 걷는데 75분 전신 마사지가 고작 2100루피였다. 우와, 또 감탄을 했다. 그러다 잠시 수도 콜롬보에 다녀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툭툭를 잡았다. 흥정이 시작됐다. 300루피에 이곳까지 왔으니까 그보다 저렴하게 200루피로 이야기가 됐다. 버스정거장을 향하는데, 기사가 말했다. “지금 콜롬보 가면 시간이 늦어질 수도 있으니까 네곰보 투어를 하는 게 어때? 2시간 동안 4000 루피면 돼, 나는 또다시 절반을 깎았다. 2000루피를 내기로 했다.

그렇게 기사님과 네곰보 명소를 쭉 둘러봤다. 슈퍼마켓에 들려서 필요한 물건도 구매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아온 기사는 도중에 누나도 만나고, 이웃도 만났다. 아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거의 전부를 알고 있는 분위기였다. 가끔 날 그들에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따뜻한 분위기였다. 서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흠이라면 지도 앱이 없어 내가 구글 지도를 보고, 인간 내비게이션이 되어 "오른쪽, 왼쪽..." 숙소까지 길 안내를 해야 했지만. 뭐, 새로운 경험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여행 경비로 인출한 돈이 꽤 많이 남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숙소에 도착했다.

근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지출을 정리하는데, 눈을 깜박깜박하게 됐다. 믿고 싶지 않아서였다. 택시비가 1450루피였다. ‘0’이 하나 빠진. 다시 말하면 1루피 1원이 아니라, 8루피였다. 스테이크는 1000원이 아니라 8000원이었고, 보트 투어와 툭툭 투어도 2000원이 아니라 1만 6000원이었다. 참고로 네곰보에서 캔디까지 버스 요금은 150루피다.


이 터무니없는 실수를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부정의 단계를 거쳐, ‘비행기를 놓쳤을 때, 쿠알라룸푸르에서 한국으로 돌아갔어야 해.’라는 자책을, 그리고 나선 ‘나는 스리랑카의 만수르’라는 자포자기에 이르게 된다. 진실을 알기 전까지 한없이 가볍고 산뜻한 하루였는데, 진실을 마주하니 좀 전의 행복들이 물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정가를 알았더라면 안 썼을 돈을 쓰고 다녔다. 그리고 행복해했다. 물론 평소보다 지출이 컸지만, 또 생각하면 감당할 수 있는 지출이었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만수르의 털끝에도 못 닿을 수준이겠지만 만수르처럼 소비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아니, 예산과 절약이라는 굴레를 잠시 벗어나는 것도 기분 좋은 일탈이 될 수 있구나, 했다. 2만 원인 줄 알았으면 혼자서 굳이라는 핑계를 대고, 안 탔을 배 투어가 유독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놓친, 놓쳤을 기회들을 되돌아보게 됐다.


스쿠르지의 여행보단 만수르의 여행이 훨씬 기대되는 이유도 일맥상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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