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은 다 했지만...

시기리야, 왕좌를 얻기 위해 부왕을 죽이고 바위산에 궁전을 짓다

by 안녕씨





하고 싶은 말은 목 밑까지 차오르지만 대부분 삼키는 편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하는 안일함 마음이 상황을 바로잡자라는 마음보다 많지는 않지만 조금 더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동남아를 두 달 넘게 여행하다 스리랑카 시리기야 SIRIGUYA에서 폭발하고야 말았다.

지금까지도 석연치 않음이 마음 한 켠에 남아있지만 그 순간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저 하고 싶었던 말을 그에게 했을 뿐이니까. 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할지는 순전히 그의 몫이니까. 나는 그렇게 경계선을 그었다.







20161031_114524.jpg 시기리야





5세기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카샤파 KASYAPA라는 사람이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부왕을 살해했다. 그렇게 원하는 권력을 얻은 그는 후환을 두려워하며 바위 꼭대기에 호화로운 궁전을 세우고, 500명의 궁녀와 향락을 즐겼다고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시리기야에는 이런 스토리가 있었고, 나는 그만 그 스토리에 매료됐다.



캔디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시리기야를 찾을 수도 있었지만 차를 하루 대절하기로 했다. 기사 역할만 맡은 현지인은 매표소에서 내가 티켓을 끊는 것까지만 도움을 주고, 차로 돌아갔다. 나는 앞에 놓인 길을 기대감을 갖고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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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인 한 명이 환한 미소를 띠우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 신물이 난 그 질문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디서 왔니? 스리랑카는 어떠니?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우며 이 상황이 빠르게 종결되기 바랬다. 그리하여 조용히 내 갈 길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그는 시리기야는 말이지 5세기에 어쩌고저쩌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피로해졌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혼자 길게 여행을 하다 보면 동행자가 있었으면 하는 순간도 분명 있다. 투어를 신청했는데, 뉴질랜드 커플, 스페인 커플, 이탈리아 커플 사이에 유일한 싱글이 돼 버렸을 때나 3일쯤 진심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참을 수 고독이 밀려올 때 그럴 때다. 하지만 그때의 난 아니었다. 애매한 미소 작전으로는 내가 원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표현을 하기로 했다. 나는 타인의 마음도 내 마음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하니까 최대한 거칠지 않게 돌려서 거절을 했다.

"혼자 가고 싶은데..... "

그랬더니, 그 아저씨는 길이 험악해서 여자 혼자는 못 올라간단다

(공포마케팅 작전에 말려든 줄도 모르고 ) 그 말에 나는 잠시 주저했다.

그렇게 매몰차게 그를 거절 못 하고 계단을 올라가다 우려되는 것이라도 확실하게 얘기하자고 했다. 불쾌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이미 낯선 이의 친절이 순수한 호의가 아니라는 것을 베트남, 태국, 미얀마에서 충분히 경험했으니까.

"나는 돈이 없어."라고 말을 하고선,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에 덧붙였다

"나는 너에게 돈을 내지 않을 거야. 괜찮아?"

그랬더니 자기는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돕고 싶은 것이라 돈은 안 내도 된단다.

그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지만 뭐, 내가 골치 아플 소지 하나는 명확하게 한 줄 알았다.

근데 공통분모가 없는 서로에 대한 호감이 1도 없는 낯선 두 사람이 시간을 보내는 건, 꽤 편안함과 거리가 먼 일이다.

그리고 그날은 컨디션도 좋지 못했다

그렇게 낯선 이와의 동행은 더 성가신 무엇이 돼 버렸다.

그래서 최후 통보를 하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갈게"

역시나 예상대로 쉽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와 시기리야 3분의 1 지점에서 지루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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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따분하고 짜증 나는 상황은 지난 두 달 동안 이윤을 목적으로 나에게 친절을 베푼 상인들에게 목 밑까지 차올랐지만 하지 못 하고 담아 둔 내 속내를 여과 없이 내뱉게 했다.


"나는 처음부터 혼자 간다고 했어. 그리고 더 확실하게 너에게 돈을 내지 않을 거라고도 했어. 너 그 말 듣고, 돈 안 내도 된다고 나에게 말했지? 기억나지? 근데 이제 와서 나한테 수고비를 달라고.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나는 안 줄 거야"



그가 말한 수고비는 고작 1달러. 그와 함께 한 시간은 한 십 분 남짓. 비싼 걸까. 저렴한 걸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데 그의 태도가 불쌍 모드에서 손가락으로 1달러만 달라는 제스처와 함께 비굴모드로 전환되고 있었다.



1달러, 사실 충분히 줄 수 있는 돈이다. 그냥 1달러 주고 이 상황을 쉽게 끝낼까 잠시 흔들리기도 했다. 근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불편했던 내가 왜 돈까지 주면서 이 상황을 마무리해야 할까. 쉬운 길 말고 바른 길 아니 필요한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돈이라는 건 고객이 원하는 걸 기분 좋게 해 주고 받는 거야. 너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 걸 기어이 고집을 부려서 해주고, 돈까지 요구하고 있어.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 않지만 너 때문에 스리랑카가 나에게는 나쁜 이미지로 기억될 거야"




그의 얼굴은 심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그는 다소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를 뒤로 하고 눈 앞에 놓인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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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는 옛 궁전이라고 지만 사실 내 눈엔 바위만 듬성듬성 놓인 공간이었다. 정원이니 저수지니 하는 설명이 있을 때 비로소 그 공간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이곳에서 기대한 것이 딱히 있었던 건 아니지만 조금 허무해지려고 하던 차에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는 곳이 보였다. 나도 그 무리에 합류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위태위태한 사다리에 올랐다.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궁녀의 빛바랜 벽화가 놓인 곳이었다. 두 명의 직원이 벽화의 훼손을 막으려고 관광객의 촬영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리기야의 최고 인기 명소인 듯싶었다.

후세에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이 공간은 왕의 의지의 산물일까. 신하들의 지나친 충성심의 결과일까. 그런 하릴없는 궁금증을 가지고 벽화를 열심히 봤다.

인도의 카주라호가 오버랩됐다. 전쟁으로 인구가 급감하자 출산 장려의 일환으로 벽에 성행위를 새겼다는 그 곳.



시리기야는 그의 말과 다르게 여자 혼자 오르기에 전혀 무리가 없었고 그래서 혼자서 잘 보고 내려왔다. 문득문득 그와의 유쾌하지 않음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타고 온 차에 몸을 싣는데,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였다. 그는 온몸을 다해 분노의 에너지를 나를 향해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시리기야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왕좌에 오르기 위해 부왕을 죽인 카샤파 왕이나 혼자의 시간을 쟁취하기 위해 모진 말을 뱉은 나

모두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지만

그로 인해 동화에나 나올 법한 해피엔딩은 얻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니, 어쩌면 원하는 것을 얻는 것과 행복은 애초에 인과 관계가 성립되는 조합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스리랑카 시기리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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