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불확실성을 꽤 즐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편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여행이 날 알게 해 준다는 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앙코르와트에서 생긴 '변수'는
앙코르와트의 입장료는 종일권 37달러, 3일권 62달러, 일주일 72달러다. 한 마디로 결코 저렴하지 않다. 참고로 현지인은 입장료가 무료다. 세 가지 선택지 중 3일권을 결제했다. 하루는 너무 짧고, 일주일은 지겨울 것 같으니 만만한 중간을 선택한 거다.
첫날과 둘째 날은 투어 상품으로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둘러봤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 됐다. 숙소에서 툭툭를 하루 대절했다. 툭툭은 오토바이를 개조한 현지의 교통수단이다. 툭툭를 타고, 여유롭게 세계 불가사의 앙코르와트와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눈에 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사와 동선을 공유했다. 입구에 내려주면, 출구에서 만나는 식이었다. 순조로웠다. 근데 사면에 부처의 상이 새겨진 바욘 사원 출구에서 낯선 현지인이 다가오면서 변수가 생겼다. 그의 손엔 내 글씨가 적힌 지도가 들려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 툭툭에 문제가 생겨서 내가 이곳에 조금 더 머물러야야 한다는 내용 같았다. 출구를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한 바퀴를 더 돌자고 했다. 이틀 전에 왔던 곳이라고 하기엔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새로웠으니 다시 한번 돌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 계획마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급하게 지도를 든 현지인이 나에게 달려왔고, 그다음엔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내 의사와 무관하게 통보에 가깝게 진행되는 일이니까 그를 따라가긴 하는데, 짜증이 확 밀려왔다. ‘미리 차량 상태를 체크해야지. 왜 이렇게 사전 준비를 미흡하게 해서는’ 그리곤 나쁜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가난한 나라에선 여행자 한 명만 털어도 평생을 살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계획에서 어긋난 상황은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왜 이런 생각을 떠올려야 하나. 마음에 안 든다.' 입을 삐죽 내민 채로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곧 내가 타야 할 자동차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행히 나 혼자 현지인과 이동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뒷좌석에 외국인 두 명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날 위험한 상황으로 빠뜨릴 만한 문신이나 흉악한 상처 같은. 그렇게 영국의 여행자 두 명과 타 프롬으로 향하게 됐다.
백수는 그렇게 침울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갑작스런 아시아 여자의 탑승, 우린 서로의 국적과 직업을 묻게 됐다. 그러다 공통분모를 찾았다. 그들은 영국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다녔지만, 최근 두바이에서 근무하다 계약 만료로 캄보디아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나 역시 2년 계약직이 끝나고 여행 중이었다. 뒷좌석에서 신나는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We are between jobs"
"우린 구직 중이야"
그는 양손을 하늘로 향하더니 율동까지 곁들였다. 그리고 그건 꽤 전염성이 강했다. 나도 어느새 합류하게 됐다.
그렇게 세 명의 백수들이 커밍아웃(?)을 하며 타프롬 사원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뒤통수를 한 대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내가 아는 백수는 경제 능력이 없는 어둡고, 칙칙한, 그리하여 가능하면 공개적으로 밝히기 꺼려지는 신분이었는데, 캄보디아에서 만난 영국인 덕분에 그 부정적인 생각들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구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얼마 전까지 회사에 소속돼 있었으니, 여행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지금은 출퇴근할 일이 없으니 세계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여행할 수 있고, 또 이렇게 관점을 달리할 수 있는 뜻밖의 인연을 만날 수 있으니 좋은 점도 꽤 있었다.
그렇게 다소 업이 된 상태로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으로 출연한 툼 레이더의 촬영지 타프롬 사원에 도착했다. 며칠 전 투어로 한 번 다녀온 곳이라고 하니, 그들은 나에게 가이드가 되어 달라고 했다. 기억을 총동원해 툼레이더의 한 장면을 배경으로 그들의 사진을 찍어줬다. 또 툼레이더를 촬영할 당시,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던 씨엠립에서 매일이다시피 안젤리나 졸리가 식사차 찾았다는 레스토랑 얘기도 곁들였다. 맛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갈만한 곳이 마땅치 않은 가운데 그나마 나았던 곳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그곳은 앤젤리나 졸리의 맛집이라는 명성으로 잘 나가고 있다고. 그들은 나에게 더 이상 백수가 아니라고 해줬다. 나는 그냥 웃었다.
그렇게 꽤 신선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의 툭툭 기사였다. 불과 한 시간 전에는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는데, 이번엔 그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다. 조금 늦게 오지.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구나 싶었다.
그날 같이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으로 교환하는데, 영국인 여행자는 나에게 두바이로 놀러 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한 시간 남짓의 만남, 그 찰라와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 거 치곤 꽤 파격적인 제안이었는데, 만약 내가 두바이에 놀러 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우연한 인연을 소중한 인연으로 발전시키는 게 인생이라면, 나는 그 기회를 놓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