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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이병현 Jan 14. 2024

<노 베어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 베어스>는 두 가지 이야기가 맞물려 진행되는 작품입니다. 먼저 출국금지를 당해 영화촬영현장인 터키에 가지 못하고 이란의 접경지역 마을에 머무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시골에서 겪는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다른 축은 터키에서 찍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처음엔 픽션처럼 보입니다)를 둘러싼 이야기가 이룹니다. 시골 마을에서 파나히 감독은 젊은 커플을 둘러싼 소동에 휘말리게 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속에서 난민 부부는 프랑스로 망명하려 갖가지 노력을 다합니다.


영화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엑스트라와 소품, 인물의 동선을 이용해 간결하게 패닝하는 카메라로 이루어진 도입부는 굉장히 유려합니다. 이어서  해당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임을 알리며 자연스럽게 감독이 원격으로 디렉팅 중임을 알리는 효과적인 편집도 효과적이죠. 이런 유려한 촬영과 편집이 허구와 현실이 뒤섞인 실험적 이야기 구성과 맞물려 벌어지는 충돌이 재밌습니다.


영화가 주안점에 두는 테마는 '외화면'입니다. 영화 중반부 주요 소품인 '고잘'과 '솔두즈'의 사진을 찍는 장면은 영화 초반에 흘러가듯이 나오는데, 마을 아이가 증언하는 장면 전까지 관객은 대체 주인공이 언제 해당 사진을 찍었다는 건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아이의 증언 이후에야 우리는 초반부 주인공이 아이와 마을 풍경을 찍을 때, 잠시 카메라를 왼쪽으로 돌려 관객이 보지 못하는 외화면을 한 번 찍는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게 됩니다. 영화는 작중 가장 중요한 장면을 관객이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리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우리는 끝까지 문제의 사진을 보지도 못하고, 해당 사진이 찍힐 때 고잘과 솔두즈가 어떤 상태였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이처럼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곳에서 비극의 씨앗은 심어집니다. '자라'와 '박티아르'가 마침내 출국을 앞두고 이웃과 이별하는 장면을 찍던 중, 자라는 박티아르가 제대로 된 여권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그러자 자파르 파나히 감독과 조감독 '레자'는 모두 당황합니다. 레자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묻는 파나히 감독에게 "박티아르를 쫓던 중 업자가 더 이상 쫓아오지 말라고 했어요.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카메라로 찍지 않아 알 수 없어요."라고 고합니다. 카메라가 보지 못하는 사이 박티아르는 사기 여권을 받았고, 박티아르의 거짓말 탓에 자라는 죽고 맙니다. 자라의 죽음 앞에서 파나히 감독은 '컷'을 외치죠.


영화의 구조를 살펴보면, 터키에서도 이란 마을에서도 카메라는 엄밀히 말해 비극의 본질과는 그다지 큰 연관을 맺지 않습니다. 하지만 카메라가 그 비극을 막는 데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죠. 작중 파나히는 카메라로 기록하는 것을 꾸란에 대고 선서하는 것보다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를 통해 거짓을 고한다는 것부터 이미 모순입니다.


원격으로 감독하던 다큐가 파국에 이른 후, 쫓기듯 마을을 떠나던 파나히 감독은 자신이 거짓말을 해서라도 감추려던 진실이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난 것을 발견합니다. 카메라는 이를 적나라하게 찍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찍어 바꿀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간바르가 촬영 버튼을 헷갈려 무심코 진실을 포착했지만, 이것이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진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중반부에 파나히 감독은 조감독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이란 국경을 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일종의 의지 표명으로, 그는 완강하게 이란 내부에서 투쟁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믿는 듯합니다. 위험한 길을 택해 그 경계까지 나아가고도 결정적인 선을 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영화 제작에 대한 비유로 보이기도 합니다. 국경선 앞에서 뒷걸음질치는 것은 죽음 앞에서 '컷'을 외치는 것과 같은 맥락에 놓인 행위죠.

그렇다면 마지막에 화면이 꺼진 후 브레이크를 밟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파나히 감독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고 나서 곧장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시동을 끄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시 출발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돌아가는 것은 상황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꺼리던 그의 원칙을 위배하는 일일까요? 아니면 그 원칙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파나히 감독이 현실에서 겪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영화 안에는 뚜렷한 답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파나히 감독이 영화가 지닌 무력함만이 아닌 무시무시함도 다룰 여유를 갖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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