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에 있는 책방, 오키로북스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글쓰기 모임을 참여하고 있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어떤 도전을 해볼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오키로미터 사장님의 뜬금없는 제안.
"이발소에 가보세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의아한 표정이었다.
동시에 물음표를 머리 위에 띄웠지만 글쓰기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버스에서 "고거 참 괜찮은 생각이다" 하며 뒤늦게 무릎을 쳤다.
요즘 남자들도 이발소보다는 미용실을 가던데, 여자가 이발소를 간다는 건 정말 재밌는 발상이었다.
우선 핸드폰을 꺼내 이발소를 검색했다. 우리 동네에 이발소가 이렇게 많았구나…하면서 화면을 내려가 던 중
[3대째 이어 내려오는 성우 이발소]
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뉴스를 클릭해서 읽어보고 다시 [성우 이발소]를 검색했다. 몇몇의 기사들, 그리고 블로그 포스팅을 읽어 보니 꽤 유명한 곳이었다. 또 100년 가까이 이어지는 시간 동안 한 곳에서 3대째 미용업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단함을 느꼈다. 훗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재밌는 추억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즉시, 위치와 휴무일을 알아봤다.
10월 18일 수요일. 버스를 타고 아현역 근처에 내려 지도 앱을 보며 15분 정도 걸어 도착했다. 문 닫았다. 정말 울고 싶었다.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문 열 때까지 기다려 볼 것인가 고민했다. 그러다 이발소 옆에 있는 쌀가게 사장님께 여쭤보니 매주 수요일이 휴무라고 하신다. 분명 인터넷으로 알아볼 때 휴무 날짜는 따로 없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주일 후 10월 26일 목요일. 다시 찾아갔다. 이번엔 지도 앱 없이도 쉽게 찾아갔고 모퉁이만 돌면 도착인데 갑자기 떨리고 부끄러웠다. 뭐가 부끄러웠는지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용기가 안 나서 삼겹살집 지나치듯 또 지나가버렸다.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마음을 가다듬고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문을 덜컥 열었더니 인터넷 기사에서 본 성우 이발소 사장님이 계셨다. 우선 인사를 드리고,
"여자 머리도 해주시나요?"
라고 조심스레 여쭈었더니, 밝은 표정으로
"아유~ 그럼요"라고 하셨다.
우선 앉아 있으라는 말을 하시고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하셨다.
나는'들어왔으니 반은 성공이다'라고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찬찬히 안을 둘러봤다.
이 공간만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옛 것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머리 감는 곳부터 벽, 의자, 선풍기, 자잘한 가구들까지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속속들이 구경하던 중에 사장님이 준비가 다 끝나신 건지 이제 의자에 앉으라는 말씀을 하셨다. 설레는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계속 기를 예정이에요. 층만 살짝 쳐서 부한 머릴 가볍게 하고 싶어요"
라고 말했다.
사장님께서는 갑자기 장 안에서 귀하게 싸맨 뭔가를 푸시더니 내게 보여주셨다. 그건 가위였다. 약간 들뜬 말투로 이 가위가 독일 제면 아주 좋은 것이라고 자랑하시며, 조심스레 머리 손질을 시작하셨다.
머리카락이 툭툭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 사장님에 이야기가 이어졌다. 몇 년 전까진 밤낮없이 바쁘게 일하셨는데, 얼마 전 평생 친구가 생겨 힘들어졌다고 하셨다. 사장님이 말한 그 친구는 슬프지만 평생을 함께 해야 할 지병이라는 친구였다. 요즘은 몸이 더 안 좋아져 시간도 줄여서 하고 있는데, 이제 좋아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속상하다고 하셨다. 내게도 그 속상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50년을 넘게 하신 일을 점점 손에서 놓아야 하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 머리카락은 슥슥 잘려 나갔다. 처음엔 층을 치는 가위가 아닌 그냥 가위로 머리카락을 살살 쳐주셨다. 두 번째엔 층과 위로 다듬어 주신 후 면도날로 머리끝을 정리해 주셨다. 엄청 정성을 다해주시는 게 느껴졌다. 머리를 다 한 후 땅을 보니 제법 머리카락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머리를 만져보니 훨씬 가벼워졌다.
머리 정돈이 끝날 즈음 할아버지 손님 한 분이 들어오셨고, 뒤쪽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계셨다. 완성된 내 머릴 뒤에서 보시더니 이쁘다고 몇 번을 칭찬해 주셨다. 얼마나 몸 둘 바를 모르겠던지…헤헷 머릴 긁적이며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할아버님과 자리를 바꾸었다.
그리고 계산을 하면서 혹시나 이곳에 대해 글을 써도 되는지 떨리는 마음으로 여쭈었다. 사장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시며 멋지게 써달라고 말씀하셨고, 다음 손님의 머리 손질을 준비하셨다. 나는 사장님과 손님으로 오신 할아버님께 몇 번의 인사를 드린 후, 낡은 문으로 다시 나왔다. 뭔가 80년대를 체험하고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이발소 안과 밖은 정말 달랐다.
긴 머리로 못생김을 가리고 다니는 사람으로서 불안감 없이 갔다는 건 솔직히 거짓말이다. 사실 의자에 앉기 시작한 이후로 끝날 때까지 계속 불안하고 초조했다. 사장님과 대화를 하는 순간순간에도 내 동공은 가위 끝을 따라다녔다. 내색하지 않고 중간중간 '끝났어요?'라고 묻고 싶은 걸 몇 번을 참았다. 하지만 다 끝나고 머릴 만졌을 때 모든 걱정은 사라졌다. 긴 머리에 숱도 많아 부했던 내 머리는 차분해졌고, 단정해 보였다.
언제 내가 또 이런 엉뚱한 도전을 해볼 수 있을까.
이발소를 가보라고 했던 사장님의 이야기로 시작된 이 짧은 시간 여행이 나에게는 오래오래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
근데 사실, 처음 가는 미용실에선 내적 갈등과 심란함으로 끝날 때까지 불안에 떨고 있지 않나요? 저만 그래요? 별점 백만 개 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