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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해보겠습니다] 목욕탕에 세신 해보기(2018)

by 브라보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큰 고무대야에 넣어두고 목욕을 시키곤 했다. 비누칠하라고 타월에 비누를 묻혀 주면 우리는 비누 칠보다는 거품으로 놀기 바빴다. 그런 우리를 보다 못한 엄마는 갖고 놀던 타월을 뺏어 우리 몸 구석구석을 닦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꼭 때를 밀어줬는데, 동생은 얌전하게 있는 것과 달리 나는 간지럽다고 이리저리 몸을 비비 꼬고, 으악 거리며 까르르 웃어댔다. 한두 번은 엄마도 웃고 넘겼지만, 점점 힘이 든 엄마는 참다 참다 젖은 내 등짝에 스매싱을 날리기도 했었다. 눈치 없던 나는 그러고도 또 웃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한 세 번 정도 맞다 보면 급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 이후로 학교 친구들과 찜질방에 놀러 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때를 밀러 간 적은 없었다. 어느 날 집에서 샤워를 하고 있다가 때를 밀고 나면 시원하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어 이번 혼자 해보기는 세신 하기로 해볼까' 하는 생각이 번뜩였다. 그렇게… 가야지, 가야지… 하는 시간이 일주일이 지나고 2주가 지나갈 무렵 '이렇게 시간을 끌다간 아무것도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알람을 열 개 정도 맞춰놓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 먼저 목욕 용품을 챙겼다. 뭐부터 준비해야 할지 어수선하게 허둥대는 나를 보며 엄마는 “비누, 타월, 샴푸, 린스, 클렌징 폼, 기초화장품” 딱 여섯 마디를 던져 주셨다. 덧붙여 “일회용 샴푸 없으면 덜어가고, 덜어갈 곳 없으면 통으로 가져가”라고 하셨다.

‘엄마 우리 샴푸 1.5리터 대용량이잖아…'

라는 말을 속으로 한 뒤 어떻게 간단하게 가져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비닐봉지를 꺼내왔다



일회용 비닐에 샴푸를 적당량 덜어 바로 위쪽을 묶어준 후 그 매듭 위에 린스를 또 적당량 덜어준다. 그리고 묶어준다. 그리고 쓸 때는 손톱으로 구멍을 내서 쓰고, 봉투는 바로 버리는 거야! 라며 기똥찬 잔머리에 스스로 감탄했다.

클렌징 폼은 일회용 렌즈 통에 넣어가기로 하고 비누와 타월은 각각 비닐에 넣어 다 같이 지퍼백에 담아 준비를 끝냈다. 씻고 난 후 바를 기초화장품 샘플을 챙기고 있으니 꼭 여행 갈 준비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동네에 있는 불가마 사우나로 향했다. 입구는 지하에->라는 표시를 따라 내려가니 매표소가 나왔다.

슬금슬금 다가가

“아. 안녕하세요. 목욕하려고요"라고 말하니,

아주머니께서 “목욕만 할 거예요?"라고 물으셨다.

옆에 가격표를 보니 목욕이 제일 저렴했고, 찜질방까지 이용하면 가격이 더 추가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결제를 마친 후 수건 두 장과 열쇠를 받았다. 그리고 들어가려는데 매표소 앞 진열대에 때수건이 있는 걸 보고 아주머니께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세신 할 건데요 때수건을 사야 하나요?”라고 여쭤보니 살짝 당황하시며,

“어… 본인이 새 걸로 하고 싶으면 사서 가져가도 되는데 세신 이모님이 쓰시는 걸로 해도 돼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챙겨가기보단, 가지고 계신 장비로 받는 게 좋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감사 인사를 하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시간은 아침 9시쯤이었는데, 사람도 없고 조용했다. 받은 열쇠로 신발과 옷을 넣어두고 챙겨 왔던 지퍼백을 들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세신 신청을 어디 가서 해야 하나 두리번거리니 한 아주머니께서

“세신 하시게?"

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덥석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네!!"

라고 대답했고, 가르쳐 주신 방향으로 갔다. 침대 3개가 나란히 있고, 벽면에는 큰 메뉴판이 있었다. 몇 가지 마사지 메뉴와 등밀이, 그리고 세신 하기가 있었다. 메뉴판을 보며 얼쩡대니 뒤에서 누군가

“때 미시게?”라고 물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작은 온탕 안에 세 아주머니가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흡사 TV나 영화에서 보던 모습이었다. 동네를 주름잡는 아주머니들의 모습 같달까. 기어가는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더니, 키 번호를 칠판에 적어두고 돈은 선불로 주면 된다고 하셨다. 나는 내 키 번호를 칠판 한가운데 작은 글씨로 '23' 적어두고 말씀하신 대로 돈 이만 원을 그 앞에 올려두고 씻으러 갔다.


비누칠을 하고 지퍼백을 한편에 두고 온탕으로 향했다. 작은 온탕 두 개, 큰 온탕 하나가 있었는데 작은 온탕에는 아까 세 아주머니들이 계셨고 다른 작은 온탕은 그 온탕과 딱 붙어있어 가까이 가기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큰 온탕으로 다가가 발을 먼저 넣었는데, 생각보다 안 뜨거웠다. 내가 알던 온탕은 너무 뜨거워서 들어갈 때 한참 걸렸었는데, 이제 이 뜨거움이 시원할 나이가 된 걸까… 탕 안에 있으면 번호를 불러 주시려나 하고 시간도 때울 겸 이것저것 구경을 했다.


벽면에 붙어있는 알림판을 정독하기도 하고, 의자 개수를 세어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냉탕 앞에서 찬물을 대 여섯 번 몸에 끼얹는 아주머니를 보며 감탄하기도 했다. 이리저리 구경은 다 했는데 불러주시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현기증이 오기 시작했다. 참다 참다 안 되겠기에 한번 물어봐야겠다 하고 침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작은 탕 안에 계시던 세분 중 한 분이 뭔가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다가오는 나를 보며 “

이제 하실 거예요?라고 물었고, 나는 "네네"라고 조심스레 대답했다.

침대 위에 수건을 깔아 주시고 그 위에 누우라고 했다. 나는 멋쩍게 올라가 누웠고 아주머니는 양손에 타월을 끼고 발부터 때를 밀어주셨다.

태어나서 엄마 말고 누군가에게 내 몸을 맡겨 본 게 처음이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민망하지 않았다. 근데 너무 아팠다. 살갗이 한 커플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게 바로 때가 벗겨지는 고통인 걸까…'

아프다고 말해볼까 고민했지만, 괜히 방해가 될까 참아보기로 했다. 쭉쭉 밀어주셨다. 때도 쭉쭉 나왔다. 깜짝 놀랐다. 남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제 발이 저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이모님 저… 때 많은 거예요? 원래 이 정도 나오는 거죠?"

"… 예에~ 많은 편인데 이 정도는 다 나와요~"

에헤 부끄러워라. 집에서 때를 조금 밀고 왔어야 했나, 이모님 속으로 '안 씻고 살았나'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라며 혼자 생각하는데 이모님이 자꾸 발을 치신다.

"뒤로 도세요~"

"네?"

"뒤로 돌으라고요~"

발을 톡톡 치는 게 바로 신호였다. 그 신호를 알 리 없는 나는 잠시 어리바리하게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뒤로도 발 톡톡 신호가 오면 자세를 바꿨고, 잠깐잠깐 이 자세가 맞는 건지 방황했지만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비누 칠로 마무리를 해주시며 이모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 쉬는 날이에요? 이 시간이면 일할 시간 아니에요?"

처음 걸어주신 말이었다. 관리를 해주시는 내내 말이 없으셔서 어쩌면 대화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웠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덥석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모님은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하신 듯했다. 나는 작은 뷰티숍(속눈썹 연장, 피부관리 등등)에서 일하고 있다. 예약제로 운영되어 출, 퇴근 시간이 유동적이라 모두가 출근하는 아침에 목욕탕에 올 수 있었다고, 이모님께 설명을 드렸다. 이모는 내 직업에 흥미를 느끼셨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셨고, 조만간 놀러 오시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조금 친밀해진 것 같았는데 벌써 모든 관리가 끝났다. 뭔가 아쉬웠다. 이제 막 이모랑 대화를 시작했는데…


모든 관리가 끝나고 감사하다는 인사들 드리고 나오려는데,

"가기 전에 나 명함 하나만 주고 가요~"

우왓. 빈말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갈 테니 잠시 뒤에 탈의실에서 보자 하셨고 나도 곧 목욕탕을 나와 탈의실로 갔다. 챙겨 온 화장품을 꺼내 얼굴에 바르고 이모님께 드릴 명함을 준비했다. 얼마 후 이모님이 나오셨고 명함을 드리며 가게 위치를 설명해 드렸다. 그리고 전화번호 교환까지 했다. 왜 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심장이 콩닥콩닥 거렸다.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섰는데 매점이 보였다. 지나칠 수 없었다.


'아 목욕탕에 왔으면 뚱뚱이 바나나우유는 먹어줘야지?'라는 생각에, 음료 코너를 살폈는데 아쉽게도 뚱뚱이는 없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 자주 먹던 제티 캔 우유가 있었다! 빨대를 꽂고 체리를 마시며 나오는 길에 왜 인지 모르겠지만, 그 옛날 고무대야 생각이 났다. 그렇게 간지럼을 참지 못해 등짝 스매싱을 맞아댔는데 이렇게 잘 참아내다니. 얼른 집에 가서 엄마한테 자랑해야겠다.


★★★☆☆

목욕탕 자주 안 가시는 분! 세신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으신 분! 부끄럼을 많이 타시는 분!

뭐든 처음이 어렵지 딱 들어가면 점점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올 때까지도 몸 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한 사람으로서 집이 최고! 우리 집 욕실이 최고!

(이건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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