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초반에는 친한 친구 덕분에 아주 좋은 야경 장소를 알고 있었다. 일명 '신촌 아트레온 뒷동산'
아트레온은 지금 cgv로 바뀌었고, 그 골목길을 지나 높은 계단을 올라가 언덕을 또 오르고 오르다 보면, 작은 동산이 나온다. 동네 사람들이 운동을 할 수 있게 운동기구들이 있었지만, 밤에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인적이 드물어 혼자 가는 건 겁이 났었다. 그래서 항상 야경이 보고픈 날에 친구를 불러 같이 가곤 했었는데, 그 친구가 유학을 떠난 후로는 간혹,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충동적으로 밤에도 낮에도 그곳을 자주 올랐었다. 가까운 친구에게도 그 장소를 소개해주고 같이 가서 빛나는 건물들을 보면서 힘든 마음을 달랬었는데, 어느 날 그 장소가 뉴스에 나온 후 발걸음을 끊어 버렸다. 그 뉴스는 살인사건에 관한 뉴스였고, 그 장소가 살인사건이 일어 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찾던 나만의 장소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로 좋은 야경 장소를 찾아봤지만 대부분 멀고, 차 없이 가기는 힘든 곳들이었다. 그렇게 야경으로 마음을 달래던 것을 잊고 살다가 우연히 당산역을 지나는 지하철 안에서 발견했다. 바로 유람선을.
2019년, 설을 보내러 시골집에 갔을 때, 산책을 하다 보니 날씨가 봄 같았다. 시골만 이런 건가 싶었지만 집으로 돌아온 날에도 경기도 날씨는 봄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때다 싶어 바로 유람선을 검색했다.
여의도 유람선을 검색했더니 3가지로 티켓이 분류되어 있었다. 안내 설명에는 승선인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운행을 해야 해서 당일 예약은 불가라고 적혀있었다. 평일은 일이 언제 끝날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주말로 예약을 했다. 예약을 하던 날에는, 요즘 날씨가 춥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심했다. 왜냐하면 예약한 시간대는 밤 9시-9시 40 타임이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웬걸..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한파가 찾아왔다. 아침 체감기온이 영하 14도라는 뉴스를 보고 벌써부터 볼이 시리고 두려웠다. 나.. 유람선 잘 탈 수 있겠지...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토요일 밤. 출발하기 전 만만의 준비를 했다. 히트텍 바지를 입고 그 위에 기모 레깅스를 입었다. 상의도 히트텍을 입고 목티를 입고 롱 기모 치마를 입었다. 아직 안 끝났다. 그 위에 허벅지까지 오는 롱 후리스를 입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롱 패딩을 입었다. 그리고서도 두껍고 넓은 털목도리를 챙겼고, 장갑도 꼈다. 마지막으로 바람에 날려 혹시 머리에 떡이라도 질까 봐 모자까지 챙겼다. 만화에 나올 법한 눈사람 같았다. 아, 롱 패딩이 검은색이니 검은 눈사람. 그렇게 전철을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4-50분 후 도착한 여의도는 정말 휑했다. 내가 왔던 중에서 가장 사람이 없고 적막하고 어둡고 추웠다. 계단 아래도 내려가 선착장까지 가야 하는데 길에 있는 건 조명뿐.. 그 많던 자전거도 없었다. 어디선가 누가 튀어나오진 않을까(겁쟁이..) 온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선착장으로 향했다. 저 멀리 휘황찬란한 조명이 보였다.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우선 매표소 쪽으로 가서 미리 해야 한다는 [승선 신고서]를 작성했다. 간단히 작성 후 매표소에서 신분증과 승선 신고서를 제출한 후에 승선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시간이 8시 20분쯤. 2번 케이트에서 승선 준비를 하라는 말에 승선 대기실로 향했다.
'이렇게 사람이 없어서야.. 이러다가 나 혼자 덩그러니 강바람 맞으며 야경 구경하는 건 아닐까' 하며 대기실 문을 열었는데.. 한강공원에 없던 사람들 다 여기 있었나 싶을 정도로 북적북적해서 깜짝 놀랐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얼마 안 남은 의자에 걸 터 앉아 발만 대롱대롱 거리며 승선 시간을 기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족단위가 많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은 것 같았다. 드문드문 연인들도 있었지만 신경 쓰이진 않았다(뭐가..?)
드디어 승선 시간! 입장권을 확인하며 천천히 유람선에 탑승했다. 거의 초반에 입장해서 사람이 없을 때 내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1층은 맨 앞에 공연하는 곳이 있고 나머지는 빨간 의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맨 뒤쪽에서 조용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사람들은 뭐가 급한지 막 뛰어들어 자리에 앉았다. '자리가 이렇게 많은데 왜지?'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앉은자리를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들 창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것. 나도 재빨리 창가 자리를 찾아봤다. 맨 뒤 딱 한자리, 정말 딱 한자리가 남아있었다. 내 마음은 나르듯이 뛰어들고 싶었지만, 경보하는 걸음으로 재빨리 남은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와 진짜 눈치 없었으면 큰일 날 뻔' 아직 출발하지 않았는데도 바깥 야경은 예술이었다. 내가 앉아 있는 쪽에는 남산타워가 보였다. 강 위에서 야경을 보는 게 특별하게 느껴지면서 설레었다.
드디어 출항. 출항한 지 몇 분 지났을까. 어떤 안내 방송이 계속 나왔지만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렸다. '뭐라는 거지'하면서 최대한 귀 기울였지만 실패. '뭐, 뭐든 하겠지'라는 마음으로 바깥을 구경하는 참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큰 음악소리와 함께 밝은 조명이 켜지고 3명의 남자가 짠~! 하듯이 나왔다. 그러더니 개그 요소가 섞인 마임을 시작했다. 나는 '뭐야 뭐야'를 속으로 안 하고 실제로 말하며 고개를 쭉 빼고 최선을 다해 관람했다. 맨 뒤여서 있는 힘껏 목을 빼야 잘 볼 수 있었다. 아무튼 나는 점점 흥미를 잃었지만 아이들은 재밌는지 까르르까르르 웃었고, 그 웃음에 힘이 났는지 3명의 공연인들의 몸짓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그런 공연을 뒤로하고 2층으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조그만 매점이 하나 있었고 맞은편으로 통유리 문이 있었다. 유리문 너머에는 넓은 갑판이 있었고 앉아서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난간을 따라 벤치가 주르륵 놓여 있었다. 유리문을 열기 전에 마음에 준비를 해야 했다. '엄청 춥겠지...' 양쪽 주머니에 넣어둔 핫팩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앞이 안 보였다. 왜냐하면 내 머리카락이 난리가 났으니까.. 머리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눈앞을 가리고 볼을 때리고 있었다. 간신히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제대로 떴다.
'음.. 나밖에 없네.. 이렇게 야경이 이쁜데..?'
너무 추웠지만, 유리창 너머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야경이었다. 그곳에 나 혼자라니. 이 차디찬 갑판 위에 나 혼자라니!! 좋았다. 유람선 갑판 위에 오롯이 혼자서 야경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까. 분명히...
칼바람과 맞서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맨 앞쪽으로 나갔다. 그리고 천천히 강 한가운데를 전진하는 유람선을 느끼며 주위를 바라봤다.
'와 저 아파트 사는 사람들 정말 좋겠네.. 이런 멋진 야경 매일 보고..'
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버려, 조금 시무룩해질 뻔했지만 이내 그 아파트들의 불빛마저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63 빌딩을 지나 쌍둥이 빌딩의 조명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조그맣게 보이던 국회의사당이 점점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즈음부터 사람들이 갑판으로 많이 올라왔고, 외국인들이 정말 많았다.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있는 사이 제일 가깝게 국회의사당에 도착했다. 깜깜한 밤에 보는 국회의사당은 뉴스에서 보던 치열함과는 다르게 따듯해 보이고,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그 위로 떠있던 초승달과 어우러져 더 멋스러웠다. 외국인들이 "뷰티풀~뷰티풀"할 때마다 괜스레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왜 내 어깨가 올라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혹시나 놀이공원 때처럼 사진 찍어달라고 하는 사람 있으면 어쩌지.. 하다가, 아냐! 멋지게 찍어줘야지! 하고 내심 말 걸어주길 기다렸는데 아무도 부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뱅뱅 돌면서 걸어 다녀도 부탁하는 사람이 왜 없는지, 도대체 나는 왜 아쉬운지..
그즈음, 유람선은 국회의사당을 찍고 다시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좀 더 주위를 둘러보며 아름다운 한강을 눈에 담고 사진으로 담... 담으려고 열심히 찍고 있었는데 나의 자랑스러운 아이폰은 추위를 많이 타서 꺼져버리고 말았다. 이제 내려가란 뜻인가 보다 하고 통유리 문을 지나,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머리는 산발에 손과 볼은 꽁꽁 얼어 있었지만 오랜만에 본 야경으로 머릿속은 다시 따듯해진 기분이 들었다. 예전 '신촌 아트레온 뒷동산'에서 야경을 보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생각을 덜어내던 내가 떠올랐다. 오늘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야경을 볼 때면 설레고 행복한 기분이 든다. 아직 가성비 좋은 야경 장소는 찾지 못했지만 오늘, 조금 비싼 야경 장소를 찾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