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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Kim Nov 07. 2019

전화위복과 새옹지마

전화위복과 새옹지마를 음미해보자.

 둘 다 좋은 일 뒤에 안 좋은 일이 온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그리고 둘 다 시대를 관통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말이다. 옛말에 틀린 게 없다지만 전화위복과 새옹지마는 어쩌다 들어맞는 흔한 옛말이 아니다. 이 둘은 마치 중력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힘으로 우리 삶에 끊임없이 작용한다.

 길흉화복이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른이 되는 필수 관문이다. 초년에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좀 더 빨리, 그렇지 않은 사람은 좀 더 늦게 인정할 뿐이다. 나는 어느 쪽인가 생각해보면 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일찍 철이 들었다는 말과 애어른이란 말을 들으며 자랐으니까.

 희와 락만 가득한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유년기의 삶은 그러해야 한다. 그래야만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서는 세상 근심을 찾아볼 수 없어야 정상이다. 아이들의 눈빛에서 행동에서 근심이 보인다면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애어른이란 말은 듣고 기뻐할 말이 아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해맑게 자라나는 게 좋다.

 물론 해맑음의 시기가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우리 삶에 불쑥 찾아온다. 예외도 없다. 처음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절망스러운 상황을 마주하면 몸을 움츠리고 눈을 질끈 감는다. 그리고 악몽에서 깨어나듯 그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처음의 고난은 그냥 적당히 봐주며 지나가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제대로 된 고난을 만나고야 만다. 이런 과정을 몇 차례 겪으며 어른이 된다.

 인생에 고통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이롭다. 평화와 고통은 숨이 멎는 그날까지 반복된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고통이 올 때마다 절망하게 되고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므로 평화의 시기를 앞당기지 못한다.

 평화의 시기에는 그저 누리면 된다. 언제 고통이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걱정하며 그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된다. 고통의 시기는 반드시 오지만 늘 그렇듯 또 지나간다.

 고통의 시기가 찾아오면 뒤돌아 봐야 한다. 통증이 없다면 인간은 몸을 마구 사용해서 단명하게 될 것이다. 치통이 있으면 치과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으므로 치아가 모두 송송 빠지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상한 음식을 먹어도 배가 아프지 않다면 독이 쌓여 죽게 될 텐데 다행히 우리의 배는 통증으로 이상을 알려준다. 배가 아프면 뭘 잘못 먹었는지 혹은 잘 때 배를 차게 한 것은 아닌지 다양한 가능성을 짚어봐야 한다.

 고통의 시기가 찾아왔을 때 해야 할 일이 이것이다. 인간관계와 함께 찾아온 고통이라면 자신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고, 일과 함께 찾아왔다면 업무에 태만함은 없었는지 일처리 방식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전화위복, 새옹지마,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오는가 싶다가도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고 또 버티고 이겨내며 꿋꿋이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초년에 고생하면 말년에 복이 온다는 말처럼 이미 고통을 많이 버텨내어 단단해진 사람이라면 시간이 갈수록 인생의 기쁨을 더 많이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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