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거 한방이 안되면 잔챙이 여러 방

기혼의 중년 남성이신 분들께 보내는 글입니다.

by 바보

친하게 지내는 이사님이 타운하우스로 이사를 갔습니다. 최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쩍 늘어 라이프 스타일을 바꿔보려고 선택한 집이라 설명했습니다. 여기에 덧붙이시길, 결혼생활이 원만하려면 중간중간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 했습니다. 아무 변화 없이 20년, 30년 이어지는 결혼생활에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결혼 초반은 그야말로 이벤트의 홍수 아니겠습니까? 결혼이라는 큰 이벤트로 시작해, 같이 살 집을 보러 다니고, 집안 살림을 하나씩 들이고, 차를 사고, 아이가 태어나고, 걷고, 말하고, 친구가 생기고, 처음으로 유치원에 가고, 처음으로 학교에 가고요.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아이 중심이던 가족 이벤트의 빈도와 강도가 점점 줄어들고 약해집니다. 부부의 삶과 딱 붙어있던 자녀의 삶이 점점 분리되는 겁니다. 자녀가 좀 더 크면 집에 와서 잠만 자는 사람이었다가, 더 시간이 흐르면 집을 떠납니다. 그리고 부부는 온기가 사라진 빈 공간에 남겨집니다. 이사님은 휑한 마음을 채우기 위한 방책으로 타운하우스 이사를 선택하셨고, 그 결과에 만족스러워하셨습니다.


단조로운 삶에 변화가 필요하단 말에는 동의를 하지만, 타운하우스로 이사를 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죠. 큰 변화에는 큰 기회비용이 따르는데 이를 감당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보다 작은 변화를 꾀합니다. 저는 티브이를 보면서도 스마트폰을 조물거리는 안 좋은 버릇이 있습니다. 인터넷 쇼핑몰에 기웃거리며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들일 궁리를 합니다. 곁에서 아내도 인터넷 쇼핑으로 심심함을 메우고 있습니다. 티브이는 혼자 떠들어대고 있어요. 이럴 때 이사님처럼 타운하우스 이사 계획을 딱 공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입니다. 게다가 타운하우스라는 큰 변화 역시 언젠가는 시들해지겠죠. 새 핸드폰은 한 달, 새 차는 3개월, 집은 1년이라 하던데, 타운하우스로의 이사는 라이프 스타일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더 큰 변화가 될 테니 2년은 가겠죠? 길게 잡아 3년이라 칩시다. 그렇다면 권태로움이 찾아오는 3년 주기로 이사를 다녀야 할까요? 그렇게 할 수도 없지만 그게 답이 되지도 않을 겁니다.


사진을 정리하던 아내가 앨범이 가득 차서 하나 새로 사야겠다 혼자 웅얼거리는 걸 얼핏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진짜 '필요'가 하나 생긴 거죠. 우리 집에 없는 건 없습니다. 핸드폰 최신형으로 바꿀까? 코트가 유행이 지난 것 같은데 버리고 새로 살까? 이런 식으로 가짜 필요를 만들곤 하는데 이처럼 진짜로 필요한 경우는 매우 드물어요. 그러니 잠시 템포를 멈추고 기쁨의 크기를 극대화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해봤습니다. 손가락 놀림 몇 번으로 순식간에 구매할 수 있었지만 그러기엔 아까운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반쯤 누워 생각하다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라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다음날 저는 몰래 사진첩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선물을 주문했으며 그게 무엇인지는 알려줄 수 없다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선물도 기쁨이겠지만, 미리 힌트를 줌으로 기다리는 즐거움도 덤으로 얻어가기를 기대하면서요. 하지만 아내가 명품가방이나 보석을 기대한다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실망할 수 있으니 스무고개를 하기로 했습니다. 너무 직접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해주지 않겠다는 단서를 붙이고요.

"비싼 거야?"

"아니."

"먹는 거야?"

"아니."

"입는 거야?"

"아니."

"내 거는 맞아?"

"응, 어제 네 입으로 필요하다고 말한걸 분명 들었어. 굳이 말하자면 같이 쓰는 거지만, 나는 필요성을 못 느꼈고 너는 필요하다 했으니 너에게 주는 선물이 맞아."

"그게 뭐야~~ 딱 내가 쓸 무언가를 줘야 선물이지."

"이 집에서 너만 쓰는 건 화장품이랑 옷뿐인데, 이 둘은 취향이 너무 분명해서 선물하기가 어려워. 게다가 예상 가능한 선물은 재미없단 말이야."

"좋아, 그러면 그것의 쓰임새는 뭐야?"

"이 질문은 너무 직접적이라서 대답해줄 수 없어."

"아 전혀 모르겠다. 뭘까? 내가 필요한 게 뭐지?"


설레어하는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이마트에 가서 20만 원어치 쇼핑을 해도 늘 먹던 식재료, 늘 쓰던 생활용품을 보충하는 개념이잖아요. 그런데 고작 2만 원 투자해서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이득 아닙니까? 이마트에서 카트 끌다가 '앨범 필요하다 했었지.' 하며 카트에 툭 던져 넣을 때의 기쁨을 1이라고 한다면, 스무고개 이벤트로 얻게 되는 기쁨은 2,3이 됩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어요. 게다가 기쁨을 누리는 시간도 훨씬 길어집니다. 툭 던지는 시간과 택배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비교나 하겠습니까?

그 기다리는 시간에도 기쁨을 배가시키는 기술이 있습니다. 우선 주문을 하고 스무고개를 하며 첫 번째 재미를 누립니다. 하루쯤 지나 택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정보를 슬쩍슬쩍 흘립니다. 가령 "색상은 베이지로 했는데 마음에 들려나?" 이런식으로요. 그렇게 미끼를 던지고 애달파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세요. 마지막으로 택배를 먼저 발견한다면 순순히 내놓지 마시고 집안 어딘가에 숨기세요. 그리고 찾으라 하세요. 못 찾으면 선물을 주지 않겠다 엄포를 놓으세요. 그리고 엉뚱한 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즐기시면 됩니다.


기혼 남성 여러분, 큰 거 한방이 안되면 이런 잔챙이 여러 방은 어떨까요? 아내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해서 사랑받는 남편이 되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유부남들의 행복도를 증진하기 위한 제안입니다. 제가 해보니 재미있어요. 사랑꾼들 보며 남성의 적으로 여겼는데 직접 해보니 반응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속는 셈 치고 딱 한 번만 해보세요. 이렇게 했는데 반응이 시큰둥하면 어쩌냐고요? 너무 안 하던 짓을 하면 서로 어색해서 그럴 수 있어요. 삼세번의 민족 아닙니까? 눈 딱 감고 세 번만 해보세요. 그러고도 계속 뜨뜻미지근한 반응뿐이라면 어쩌냐고요? 하... 한 번뿐인 인생인데... 이를 어쩌나... 이런 경우는 뭐라 말씀드려야 하나... 판단은 각자의 몫이라 생각하기에... 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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