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끈이 쓸데없이 긴 내가 바라보는 배움의 가치는 대단치 않고, 차고 넘치게 소유한 내가 바라보는 소유의 가치도 대단치 않다. 지나치게 많이 가진 이들에 대한 편견들이 존재하듯, 배움이 짧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갖기 쉬운 편견들이 있는데, 우리 외할머니는 편견을 깨는 분이었다. 가난하고 배운 게 없어도 품위 있는 사람은 존재함을 내게 보여주신 분이 우리 외할머니다. 나는 외할머니를 보며 그 사람의 품격을 만드는 건 마음의 온도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외할머니와 닮은 셋째 이모, 그리고 그 셋째 이모를 닮은 사촌 동생이다.
외할머니는 4명의 딸을 낳았다. 첫째인 우리 엄마와 막내인 꼬마 이모는 유난히 순수(어쩌면 순진)하고 꾸밈이 없다. 이 둘은 성격도 외모도 너무나 닮았다. 그래서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이 과학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둘째는 셈이 빠르고 유쾌하다. 가장 예쁘고, 또 본인이 예쁜 걸 안다. 깍쟁이라서 자기 밥그릇은 확실히 사수할 분이다. 셋째는 반대로 자기 밥그릇은 잘 못 챙기고, 대신 동생 밥그릇은 확실히 챙겨줄 사람이다. 이런 면에서 셋째 이모는 외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 마음의 온도가 닮았단 말이다.
택시기사에게 시집간 셋째 이모는 코딱지만 한 단칸방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아기를 낳고 그 아기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에는 살림이 조금 나아져서 방이 두 칸 있는 옆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 아기는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생일이 몇 달 느리다는 이유로 나를 형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셋째 이모와 마음의 온도가 닮은 내 사촌동생은 본인이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형도 좋아하겠지 생각하며 본인 용돈을 모아서 내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포장도 뜯지 않고 내가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언박싱을 하고 한나절 가지고 놀다가 너도 좀 가지고 놀아보라고 주면 그렇게 기뻐했다. 셋째 이모는 내가 오는 날에는 내가 좋아하는 꼬막과 두루치기를 해주셨다. 그리고 매일 아침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보셨다. 아들 용돈 주는 날에는 나에게도 용돈을 주셨다. 게다가 형이라고 좀 더 주셨다. 그리고 집에 갈 때는 또 용돈을 주셨다. 가면서 먹으라고 간식도 싸주셨다. 사촌 동생은 내가 떠나는 날에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다 가져가라 했다. 뻔뻔한 나였기에 이 날은 한살림 챙기는 날이었다. 내가 떠나는 날에는 늘 눈물로 배웅해주었다. 그 눈물이 고마워서 나도 울곤 했다. 마음이 따뜻한 두 명의 대접에 맛 들인 나는 방학 때마다 이 집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방학식 하는 날 혼자 기차를 타고 셋째 이모집에 가서 한 달 동안 먹고, 자고, 놀다 개학할 때 집에 돌아가곤 했다. 이 맛을 아는 또 다른 사촌들도 며칠씩 머물다 가곤 했지만 나처럼 뻔뻔하게 방학 내도록 지내는 이는 없었다.
셋째 이모의 남편, 즉 이모부는 근면 성실하고 절약정신이 투철한 분이셨다. 택시일을 하다가 식사시간이 되면 꼭 집에 와서 식사를 하셨고, 일이 끝나면 농사일을 하고 가축을 기르셨다. 물론 식사 준비를 하고 농사일을 도운 셋째 이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모은 종잣돈으로 개인택시를 사고, 집을 짓고, 농토를 늘려나가다 동네 일대가 개발되면서 부자가 되었다.
셈이 빠른 둘째 이모는 동네 유지의 아들과 결혼을 했다. 일찌감치 현대식 냉난방 시스템이 갖춰진 호화스러운 집에서 사셨는데, 여름에는 춥고 겨울엔 더운 집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겨울에는 집에서도 내복을 입고 있어야 하는 게 상식이던 시절에 반팔 반바지를 입고 있는 셋째 이모네 가족들의 풍경은 다른 나라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모부는 동네 유지답게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셨는데, 번번이 근소한 차이로 낙마하셨다. 그럴수록 더욱 오기가 생겨 선거운동하는데 더 많은 재산을 가져다 쓰시기를 반복하다 결국 파산했다.
깍쟁이 둘째 이모와 셈을 할 줄 모르는 셋째 이모의 삶을 모아놓고 보면 마음 씀씀이가 복을 불러오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