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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Kim Aug 15. 2023

'왕의 DNA' 갑질을 양산하는 구조적 결함


 교육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초등학교 교사 출신 강사를 두 명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서울대 출신 또는 유학파여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어서인지 정교수는커녕 부교수로 임명된 경우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는 두 분 강사님의 강의는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단지 드물기 때문이 아니라 현장감 측면에서 남달라 피가 되고 살이 됨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 귀를 쫑긋 세우며 경청하게 되었다.

 

 운이 나빠서 교사 출신 강사님을 두 명 밖에 만나지 못한 게 아니다. 운이 좋아서 두 명이나 만날 수 있었던 거다. 출신대학이나 학과에 따라서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잠깐 눈을 감고, 의료 경험이 있는 교수님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졸업한 의과대학 졸업생을 상상해 보라. 눈을 떠보자. 당신은 그를 졸업장이 있다는 이유로 전문성을 갖춘 의사라 인정할 수 있겠는가? 아마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교사인 나 조차도 자신 있게 '교사는 전문직이다.' 말하기 쑥스러운 대목이다. 교사들은 교육 현장에서 각자의 전문성을 쌓고 있지만, 그 전문성이 집대성되지 못하고, 그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함이 대한민국의 교육의 근원적인 구조적 결함이다.


 교육대학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 교사가 교육 현장에 나오면 교육청-교육지원청-학교로 이어지는 위계가 분명한 교육계의 말단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구름으로 덮여 잘 보이지도 않는 저 까마득하게 높은 산 꼭대기에 장학사님이 살고 계신다.


  '내일 장학사 온다, 반들 반들하게 청소해라!'에서의 장학사가 근무하는 교육청과 교육지원청에는 사실 교육행정직 직원들이 훨씬 많다. 대략 4배 정도 더 많은 행정직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적으로는 적을지언정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을까? 장학사들은 5~6년 근무하고 다시 학교 현장으로 돌아오는 반면, 행정직은 당연하게도 오래오래 자리를 지킨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자~ 이십 년 가량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장학사 시험에 합격해서 교육지원청에 발령을 받은 장학사 김 아무개 씨를 상상해 보자. 그에게 맡겨진 일들은 한아름인데 모두 처음 해보는 일이다. 함께 일하는 사무관님들은 나이가 어려도 교육청 일이 처음인 햇병아리 앞에서는 대선배님들이다. 하물며 경력과 나이가 많은 중견 사무관님들은 그야말로 하늘 같은 선배님이라 하겠다. 장학사 시험에 합격했다 해서 회계 처리 지침에 근거해서 회계 문서를 뚝딱 작성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경영지원과가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일면식도 없는 경영지원과 실무자를 설득해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 대선배님과 하늘 같은 선배님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열심히 일을 배워서 내 몫을 해내야 한다. 1~2년 정도야 신입이기에 기꺼이 아량을 베풀어 주겠지만, 그 이후로는 기대할 수도 기대해서도 안된다. 그러니 퇴근을 늦추며 일을 익히는 수밖에 없다. 사실 1~2년이라도 일을 가르쳐주는 사무관님을 만난다는 건 큰 행운이다. 각자의 업무가 철저히 분리되어 서로의 일에 간섭, 관여를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 시행착오를 거치며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경우도 많고, 업무 분장에서의 기득권이 전무하므로 일이 많고 까다로워서 다들 기피하는 업무를 잔뜩 떠안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내일 장학사 온다, 반들 반들하게 청소해라!'에서의 위엄의 상징으로 보이던 장학사의 실상은 이러하다. 학교 현장에서 본인이 겪었던 어려움을 반영하여 멋진 정책을 시행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반면, 학교 현장에서 느끼는 장학사들의 위엄은 예전 같지는 않더라도 여전하다. 학교에서의 최고의 권력을 가진 교장선생님에 대한 평가 권한이 교육청에 있으니, 여러 가지 교육활동을 잘하고 있는지 담임장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시찰하러 나오는 장학사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장학사의 뿌리는 일제강점기의 '시학관'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시학은 영어로 inspection에 해당한다. 즉, 애초에 감시, 감독을 목적으로 제도가 성립된 것이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러 가지 명칭이 재정립되는 등 변화가 있었으나, 장학사가 학교 현장에 나와 수업 장학을 하고, 학교의 제도 정책적인 컨설팅을 하는 장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자 지금부터 새내기 교사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자. 교육 현장에 나와 교육청-교육지원청-학교로 이어지는 위계가 분명한 교육계의 말단으로 일을 시작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옆반 선생님, 그에게 일을 맡기는 부장 선생님, 그 위에는 부장 선생님에게 업무 지시를 하는 교무부장 선생님, 그 위에는 교감 선생님, 그 위에는 교장 선생님이 계신다. 학교의 상위 기관인 교육 지원청과 교육청에는 장학사님이 계신다. 그리고 장학사님을 가르치시며 함께 일하는 사무관님이 계신다. 아! 사무관님은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


자!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사무관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 널리 알려 함께 찬양하고자 함이 아니라, 교육계의 구조적인 모순을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첫째, 학교의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는 교육청에는 교사 출신 인원이 20퍼센트 이하이고, 그나마도 4-5년 일해서 일이 손에 익을까 싶으면 다시 학교 현장으로 돌아오는 현실이라 80퍼센트를 차지하는 교육행정직 사무관님들과 비교하여 영향력이 제한적이다. 다시 말해, 학교의 정책을 세우는 데 교사들의 영향은 미미하다.


둘째, 장학사들의 경우 가만히 있기만 하면 교감으로 승진되는데, 굳이 잡음을 만들어서 기회를 날리고 싶지 않기에 무리하면서까지 혁신을 추구할 동기가 부족하다. 다시 말해, 장학사 시험에 합격하는 순간 기득권의 대열에 서게 되는 건데, 굳이?


셋째, 겹겹이 층을 이루는 명확한 위계가 있어서 그 말단에 있는 교사들의 말에는 힘이 없다. 공문이 하달되어 시행해야 하는데, 우리 학교 현실에는 맞지 않아 교육적인 성과가 미미할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옆반 선생님에게 상의를 한 후 동의를 얻어 부장 선생님과 협의를 한다. 부장 선생님도 문제 인식을 같이하여 교무부장 선생님에게 협조를 요청한다. 교무 부장 선생님이 관리자분들과 협의해서 우리 학교는 시행하지 않는 것으로 하면 좋겠다 하셔서, 교감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에게 보고 드린다. 교감 교장 선생님께서 지지해 주시면 교육청에는 서면으로 보고할지, 출장을 가서 대면하여 설명을 드릴지 교무부장님과 협의를 한다. 결정된 적당한 방법으로 담임 장학사님에게 보고 드린다. 장학사님은 담당 장학관님, 함께 일하는 사무관님과 협의를 한다. 그런데 이 사업의 예산이 교육부에서부터 하달된 것이라 우선 도교육청 장학사님에게 보고를 하고 답변을 기다린다. 한참만에 답변이 와서는 예산 문제를 먼저 살펴보란다. 그래서 경영지원과 협조요청을 하여서 어떤 학교에서 사용하지 않는 예산을 반환하려 하는데 가능한지 문의를 한다. 자 이제 중간까지 왔다....' 이런 식이다. 매일매일 학생들과 호흡하며 가르치고 학급을 경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라는데, 소모적인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그러니 상위 기관에서 하라면 군소리 말고 그냥 하는 게 상책이다. 끝까지 관철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그 과정에 윗사람 누군가에게 찍힐 가능성은 매우 높기 때문이다.


넷째, 하위 기관은 상위 기관에서 하라면 군소리 없이 하다 보니 의무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안전교육 51시간, 식생활 교육 2시간, 학교폭력 예방교육 학기당 2시간, 아동학대 예방교육 8시간, 교통안전 교육 2개월마다 실시, 성교육 20시간, 실종예방교육 10시간, 흡연, 음주 등 약물 오남용 예방 교육 3개월마다 실시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의무가 생겨나고 없어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핸드폰 중독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 교육부는 인터넷 중독 예방교육을 의무로 하라고 교육청에 지시하고, 그러면 교육청은 지원청에, 지원청은 학교에 지시를 한다. 그렇게 생겨난 의무 교육이 너무 많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생겨나고 있기에 헤아릴 수가 없다. 게다가 교육부의 높으신 누군가 '아동학대 문제가 다시 불거졌으니 두배로 늘리게~' 하면 아동학대 예방교육이 16시간이 되는 거라 매해 의무 교육시간이 몇 시간인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번거로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교사가 받아야 하는 의무 연수도 비슷한 이유로 매해 생겨나서 사라지지는 않으니 쌓여만 간다. 어떤 연수는 집합 연수가 의무이고, 어떤 연수는 결과 보고도 의무이고, 어떤 연수는 학부모들도 교육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연수를 하라 한다. 이렇게 각종 의무는 생겨나서 더 복잡해질 뿐 사라지지는 않으니 일이 쌓여만 간다. 의무 교육뿐만 아니라 각종 업무도 마찬가지다. 교육부에서 만든 업무, 교육청 단위에서 만든 업무, 지원청 단위에서 만든 업무는 모두 학교에 와서 쌓인다. 그렇게 쌓인 업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업무가 과중하여 정작 중심이 되어야 할 수업이 뒷전이 되는 '교육 파행'이 일어나도 교육청과 교육부에서는 알 길이 없다. 알더라도 '우리 교육지원청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육을 지원하는 기관입니다. 교육을 시행하는 권한과 책임은 학교에 있습니다'라며 책임낙수 정신을 실천할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교육부와 교육청에서 일하는 사무관님들은 학창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경험 외에는 학교의 경험이 없기에 교사들의 어려움 자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다섯째, 교육자치의 시대라 말하지만 이는 책임의 이양일뿐 권한은 이양되지 않고 오히려 가지고 있던 권한을 하나 둘 빼앗아 점점 줄어들다 끝내 사라졌다. 마치 우리는 조종대가 뽑혀있는 배에 타고 있고, 우리 배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리모컨으로 우리 배를 조정하고 있는 듯하다. 수십 년 전 본인의 학창 시절에 경험한 학교가 학교 경험의 전부인 자들에 의해 학교가 좌지우지되다 보니 교육계 전체가 좌초될 이기에 처해있다. 학교 현장에는 교실 붕괴에 대한 경고를 넘어 비명소리가 가득하다. 지난 10년 동안 그 비명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 비명 소리가 너무나 커져서 귀가 아플 정도다. 하지만 다른 배에 타고 있는 그들은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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