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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Kim Aug 07. 2023

한국형 카스트제도가 출산율에 미치는 영향

 "결혼하면서 이사를 해야 하는데 상급지로 이사 가자니 대출 부담이 크고, 하급지로 가자니 당장은 부담이 없지만 아기 낳고 키울 것까지 생각하니 꺼려져요."


얼마 전 결혼을 앞둔 직장 후배가 이사를 고민하며 했던 말이다. 이 날따라 상급지, 하급지라는 말이 유독 귀에 꽂혔다. 평소 많이 듣던 말이지만 그날따라 뾰로통한 마음이 돋아났던 것이다. 상급, 중급, 하급으로 마을의 가치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는 전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기 좋은 마을이란 주관적인 가치가 아니던가?'


 교육, 교통, 상권 등 마을의 가치를 고루 따져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일진대, 결국 그 가치는 매매가와 전세가에 반영되니 상급지는 결국 값이 비싼 동네를 일컫는 말이 된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동네에 행복한 추억이 한가득이다. 방학 때면 살다시피 한 사촌이 살던 시골 동네에서도 또 다른 유형의 행복한 추억이 한가득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에 상급이 있고 하급이 있다는 생각은 자라는 동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에 전염되어서 상급지에 살아서 우쭐해진다거나 하급지에 살아서 기죽는 일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나아가 내 아이가 하급지에서 산다는 이유로 기죽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대한민국에는 보이지 않는 카스트가 존재한다. 마을의 등급 안에는 다시 주거형태로 세분화된 등급이 매겨진다. 아파트인지 빌라인지에 따라, 아파트에서도 커뮤니티 시설이 갖춰진 신축인지 오래된 구축인지에 따라, 구축 아파트 중에서도 재개발 가능성에 따라, 신축 아파트 중에서도 브랜드 아파트인지 휴먼시아 아파트인지에 따라 세부적인 카스트가 존재한다.


 카스트는 학교에 따라서도 등급이 세분화된다. 예전에는 대학의 서열만 있었다면, 언젠가부터는 서울 주요 대학 진학률에 따라 고등학교의 등급이 나뉘고, 지금은 높은 서열에 위치한 고등학교에 많이 보내는지에 따라 중학교 서열이 형성된다 하니 이러다 초등학교와 유치원까지 서열이 생기는 게 아닐지 걱정스럽다. 아!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게 중산층의 기본이라니 이미 유치원도 한국형 카스트 제도의 일부가 된 게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 사회는 서열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말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 하면서 직업의 종류에 따라 서열을 매긴다. 특정 직업군의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막론하고 일단 존경과 부러움으로 찬사를 표하며 환대한다. 또 어떤 직업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쯤으로 여기며,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유한 일로 자리매김 해가는 직업군도 꽤나 있다. 이게 불가촉천민과 무슨 차이인가 싶다.


 우리 사회는 물건에도 서열을 매긴다. 값비싼 물건인 자동차나 보석류에 서열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시계, 가방, 그릇 등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에도 서열이 있단다. 그 서열의 상층부에 있는 브랜드를 명품이라 하는데, 그 명품 브랜드 안에서도 또다시 서열이 있단다. 그런데 나도 잘 모르는 그 촘촘한 서열을 초등학생들이 줄줄 외는 건 가정교육이 잘 작동하고 있다 표현해야 하려나.


 천성적으로 서열 따지기를 좋아하는 민족인 걸까? 아니면 위계가 분명한 군대를 거쳐간 이들이 만든 사회여서일까? 대한민국은 높고 낮음, 갑과 을이 분명하다.


 '손님이 왕이다.' 정신은 대한민국의 갑과 을의 정서를 고스란히 대변한다. 나만 해도 식당이나 가게에서 종업원이 인사할 때 함께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던가 반성하게 된다. 많은 경우 내가 하고 싶은 말과 필요한 말만 했던 것 같다. 또 물건에 문제가 있어 고객센터에 문의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무의식 중에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 정신이 발동하여 문의라는 탈을 쓴 갑질을 행했던 게 아닐까 반성하게 된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때로는 서비스 제공자이고, 때로는 수혜자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우리는 때로는 갑으로 때로는 을로 살아간다. 위계가 분명한 대한민국형 카스트 사회에서 때로는 스트레스를 주고 때로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때로는 누군가를 괴롭히고, 때로는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간다는 말이다. 내 자식이 슈퍼을이 되어 괴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슈퍼갑이 되어 고통의 근원이 되는 것 역시 결코 기쁘지 않다. 그러니 갑과 을로 구분되는 세상에서 승자는 없다.


 아파트 입주민의 갑질에 시달리던 어느 경비원의 자살, 악성 민원에 시달리던 어느 교사의 자살 등의 사회적 이슈가 있으면 권위를 좀 높여주자는 사회적 논의가 힘을 받는다. 그렇다고 월급을 받는 경비원의 위치를 월급을 주는 입주민과 동일한 갑의 자리로 올려주는 것은 곤란하고, 갑과 을의 사이 어딘가에 새로운 위치를 설정하자는 식의 억지스러운 논의로 이어지다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흐지부지 된다. 경우에 따라 경비실에 낡은 선풍기 대신 에어컨을 설치해 주는 정도의 선심을 쓰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 하지만 여전히 갑질문제는 반복되고 있다.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교사들 역시 월급 제공자인 학부모와 같은 위치에 놓이는 건 곤란하기에 갑과 을 사이 어딘가로 자리를 내어주려 한다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못할 것이며 교실 붕괴는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


 이쯤 되면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며 반문할지 모르겠다. 종업원도 경비원도 갑이 되고, 교사들도 다 갑이 되면 도대체 을의 자리에는 누가 남아있는 거냐? 돈을 지불하는 손님이 을이 되고, 월급을 주는 입주민이 을이 되고, 세금을 내는 학부모가 을이 되는 게 말이 되냐? 아니 그럼 손님이 왕이 아니라면 종업원이 왕이란 말이냐? 따져 묻고 싶을지 모르겠다.


 그런 말이 아니다. 갑과 을은 원래의 쓰임새가 그러했듯이 법적인 문서 작성을 위해서만 남겨두고 우리 머릿속에서 지워야 우리나라가 산다는 말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서 살아남아 지금껏 인도의 발목을 잡는 것처럼, 이놈의 K-카스트 역시 우리 개개인에 각인된 갑과 을의 개념을 없애지 않는 한 끝끝내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결국 한국형 카스트가 존재하는 한 출산율은 0으로 수렴할 일만 남았다는 게 나의 생각인데, 허무맹랑한 공상일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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