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챙이에게 개구리를 강요하는 나라

by 바보

유치원 의대반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실제임을 알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강남의 몇몇 학원에서는 아이들이 의사가 되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유아 수준에 맞춰 커리큘럼으로 만들었고, 학부모들은 대기 신청을 하느라 바쁘다는 뉴스를 내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고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요즘 아이들 말로 '실화냐?' 싶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와버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이제 자음과 모음을 공부할 나이에, 벌써 생명과학 용어를 외우고, 세포 구조를 그려야 하다니.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고, 한편으로는 눈물이 납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수학이 너무 어렵다며 울었다고 합니다. 도형 단원에서 ‘각도기’가 등장하자 멘붕이 왔다고 하네요. 친구들은 이미 ‘중학교 심화문제집’을 푼다고 하니, 부모는 조급해지고, 아이는 조용히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됩니다.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에게 “그래도 읽어야 해”라고 말하는 부모의 표정에는 체념이 섞여 있습니다. 즐거운 독서가 아니라, 처방전처럼 읽어야 하는 독서. 아이는 묻습니다. “엄마, 왜 책을 읽어야 해?” 부모는 대답합니다. “나중에 시험 볼 때 도움이 되니까.” 이 얼마나 슬픈 이유인지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많은 학부모들은 말합니다. “학교 교과서는 너무 쉬워요. 우리 아이 수준에는 안 맞아요.” 그래서 교과서 진도보다 앞선 문제집을 사주고, 한 학년 위, 두 학년 위를 선행하는 학원을 알아봅니다. 교과서로는 부족하니, 중등 수학, 고등 수학, 때로는 대학 수학까지 접하게 합니다. 초등학생이 해냈다고 하면, 주변에서 박수가 터집니다. 잘 키웠다는 칭찬이 쏟아집니다. 이 박수가, 이 박수 한 번이, 아이를 올챙이에서 바로 개구리로 뛰게 만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국의 초등학교 교과서가 정말 그렇게 쉬운 걸까요?


세계 여러 나라의 교과서를 비교해 보면, 한국 교과서는 결코 쉬운 축에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념의 난이도나 내용량은 높은 편입니다. 핀란드, 일본, 독일 등의 초등학교 교과서는 개념의 깊이나 속도 면에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여유롭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려움을 느끼는 건, 그 내용이 너무 쉬워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기초 없이 그 위에 무언가를 계속 덧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가 소화하기엔 너무 이른 개념들을 ‘당연한 것’처럼 흘려보내니, 공부가 어렵고, 읽기가 지겹고, 학교가 버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합니다. 그런데 정말 ‘어린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를 알고는 있는 걸까요?


방정환 선생님은 ‘아이’라는 단어 대신 ‘어린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었습니다. 어른과는 구별되는 존재로서,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서의 이름입니다. 올챙이는 개구리의 미완성이 아닙니다. 올챙이는 올챙이대로 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올챙이에게 다리가 없다고, 뛰지 못한다고 나무랍니다. 개구리처럼 점프하지 못한다고 속상해합니다. 가끔은 올챙이를 개구리 점프대에 세워놓고 “왜 못 뛰니?”라며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고는 “지금 이 시기를 잘 넘겨야 나중에 큰일 할 수 있어”라는 말로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넵니다.

어린이날을 맞이해,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아이들을 ‘어린이’로 대하고 있는가?
아이의 속도와 마음을 존중하고 있는가?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 공부를 즐거워하는 아이로 자라면 안 되는 걸까요? 책을 많이 읽는 아이가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면 안 되는 걸까요? 수학을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 수학에 흥미를 느끼는 아이로 크면 안 되는 걸까요?

올챙이는 언젠가 개구리가 됩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성장에는 ‘때’가 있습니다. 아이에게 맞는 시기, 아이에게 맞는 속도, 아이만의 호흡이 있습니다. 그걸 존중해 줄 수 있는 사회가 진짜 아이를 사랑하는 사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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