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 00 있잖아, 걔 다음 달에 결혼한대.”
“그래? 신랑 직업이 뭐래? 대학은 어디 나왔대?”
그 사람의 이름도, 성격도, 살아온 이야기도 알지 못한 채 직업과 학벌을 먼저 궁금해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속물이라며 비판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가요?
“동창 00 있잖아, 걔 다음 달에 결혼한대.”
“그래? 신랑 직업이 뭐래? 대학은 어디 나왔대?”
“대학 안 나왔대. 고졸이래”
어떤 대화가 이어질까요? 각자 상상해 봅시다.
충분히 상상하셨다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더 이상 단순한 학문의 공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설명이 되는 일종의 사회적 이력서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한다는 선택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대학에 안 갔다니, 무슨 사정이 있나 봐.”
“세상이 달라졌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문대라도 나와야지.”
이런 말들 속에는, 학력이 곧 사람의 수준을 말해준다는 깊은 편견이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통계를 보면, 이 편견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입니다. 2023년 기준 고등학교 졸업생의 72.1%가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반면, 대학에서 배운 전공과 실제 직업이 연결되는 비율은 3~4% 수준에 불과합니다.
즉, 수많은 이들이 대학이라는 문을 통과하지만, 그 안에서 쌓은 배움은 졸업과 함께 흩어지는 먼지처럼 잊히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무의미한’ 대학 진학 경쟁을 멈추지 못하는 걸까요?
첫 번째 이유는, 노동시장 구조의 불평등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임금 격차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대기업 정규직의 평균 연봉은 중소기업의 2~3배에 이릅니다. 복지, 근로환경, 안정성 등에서도 차이는 극심합니다. 결국 대학은 단지 ‘학문’의 공간이 아니라,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권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청년들이 대입 경쟁에 몰두하고, 재수·삼수는 물론, 취업을 위한 외모 경쟁과 어학 스펙까지 감당해 가며 무한 레이스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합니다. 대기업에 입사하는 청년은 고작 전체의 5% 남짓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비진학’ 경로에 대한 사회적 존중 부족입니다.
기술을 배워 현장에 나가거나,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에겐 “공부를 못했으니까 그렇겠지”라는 시선이 따릅니다.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에서 일하거나, 자영업을 택한 이들에게 “잘 안 풀려서 그런 거지”라는 낙인이 찍힙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교육 안에서도 재생산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대학은 가라”는 말은 사실상, “대학에 안 가면, 괜찮은 인생은 어렵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국이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독일이 되어 있는 일은 없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해 독일 사회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이니 이미 알고 있다면 괄호 부분의 글은 스킵하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복지국가가 대동소이한데 그중 독일을 예시로 들어 설명할 뿐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독일이 정답이다! 독일 최고! 이런 주장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기를 바라며 최대한 간단한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독일에서는 의사와 배관공 같은 전문 기술직 종사자들이 서로 다른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며, 사회적으로 동등한 존중을 받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인식에 그치지 않고, 실제 생활 수준과 사회적 대우에서도 나타납니다.
독일의 직업 교육 시스템은 '마이스터(Master)' 제도를 통해 기술직 종사자들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배관공이 마이스터 자격을 취득하면, 독립적인 사업 운영이 가능하며, 이는 높은 소득과 사회적 신뢰로 이어집니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전기 기술자나 자동차 정비사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자들이 높은 수요와 전문성으로 인해 상당한 수입을 올리며, 이는 의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기술직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강화하고, 다양한 직업 선택을 장려하는 데 기여합니다. 독일의 사례는 직업의 종류에 관계없이 전문성과 기여도를 인정하는 문화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마이스터가 대학 학위와 동등한 수준의 고등 직업교육 자격으로 법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많은 부모들이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큼이나 마이스터가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즉, 독일은 ‘직업’보다 ‘전문성’에 무게를 두는 사회입니다. 이 때문에 기술자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편견을 겪는 일이 거의 없고, 고졸 → 직업학교 → 마이스터로 이어지는 경로 역시 성공적인 삶의 당당한 길로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회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노동 시장의 구조도, 복지 제도의 기반도 다릅니다. 그러니 “유럽 복지국가를 본받자”는 식의 해법은,
언뜻 있어 보일 수는 있어도 현실을 모르고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뾰족한 해법이 쉽게 보이지 않는 건 그만큼 구조가 깊고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임금과 노동 조건의 격차를 줄이는 구조적 개혁 없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조적 개혁이 필요합니다!”라고만 외친다면, 그건 마치 학급회장 선거에 나온 학생이
“저를 뽑아주시면 학교폭력 없는 반을 만들겠습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진정성이 있더라도, 방법이 구체화되지 않으면 그 또한 무책임한 말입니다.
그렇다고 또 이 문제를 ‘너무나 큰 담론’이라며 덮고 지나가기엔, 그 담론 안에 내 제자들이 살아갈 대한민국이 들어 있기에, 마음을 편히 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몸담은 교육이라는 자리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고민 끝에 세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진로 다양성에 대한 실질적인 존중을 일상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일터에 나가는 길이 ‘열등한 선택’이 되지 않도록,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함께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떤 길을 가느냐보다, 어떻게 가느냐'가 더 중요한 사회를 만드는 일. 그 시작은 존중받는 선택지를 다양하게 제시하는 교육입니다.
둘째, ‘마이스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직업계고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현재의 직업계고는 여전히 ‘일반고에 가지 못한 학생들이 가는 학교’라는 편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졸업 후 마이스터가 될 수 있는 전문성과 가능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에도, 학교의 시스템이나 사회적 인식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직업계고는 단순히 기술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전문 영역을 책임지고 설계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 기관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요구됩니다.
전문성과 연계된 커리큘럼 강화: 단기 기능 습득을 넘어, 문제 해결력과 기획 역량까지 함께 키울 수 있는 교육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이스터가 되기 위한 기초 역량을 학교 교육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쌓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기업과의 연계 확대: 단순 인턴십을 넘어, 학교와 기업이 공동으로 커리큘럼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이중 교육 시스템’ 도입이 필요합니다. 이는 독일의 마이스터 시스템이 자리 잡은 중요한 기반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한 제도적 지원: 직업계고 출신 마이스터들이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대학 졸업자와 동등한 자격 인증, 자영업 지원, 진로 로드맵 제공 등 구체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셋째, 마이스터의 범위를 확장합시다.
최근 몇 년 사이, 요리 경연 프로그램의 인기 덕분에 셰프들의 활약이 아이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제 요리사는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만의 창의력과 전문성을 발휘하는 ‘존경받는 직업’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요리를 포함해, 유튜버, 패션, 바리스타, 애니메이션 디렉터, 게임 아트 등 새로운 세대가 선호하고 몰입하는 창의적 기술 분야는 이미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부분은 아직까지 공식적인 마이스터 체계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따라서 제안합니다. 마이스터의 영역을 기존의 전통 기술 직종에 한정하지 말고, 미래 사회에서 중요한 창의기술 기반의 직업군까지 폭넓게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요리를 좋아하는 아이는 요리를, 영상 편집에 빠진 아이는 영상 콘텐츠를, 수공예나 디자인에 소질 있는 아이는 그 분야를, 단순한 '취미'가 아닌 '전문 직업의 꿈'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마이스터가 존중받는 사회는 결국 다양한 삶이 존중받는 사회와 연결됩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해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두가 같은 길을 향해 달리는 사회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더 이상 용기나 불안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일. 그 일은 교육이 할 수 있는, 그리고 교육만이 시작할 수 있는 변화라 생각합니다.
성공한 삶이란, 하나로 정해진 형태일 수 없습니다.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 꿈과 백 개의 길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양함을 사회가 먼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교육은 그 다양한 가능성이 움틀 수 있도록 돕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나의 제자들이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손으로 일하는 사람이 될 거야.”
“나는 내 이름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거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저는, 혹시 현실 감각을 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상주의자인 걸까요?
1등을 놓치지 않던 제자가 의사가 되고, 자신의 길을 찾은 또 다른 제자가 기술자가 되어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삶의 속도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저는, 어설픈 공상가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첫걸음이 학교라는 가장 작은 사회에서부터 시작된다면, 제가 꿈꾸는 그 날이 그리 멀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혼자 꾸면 꿈이지만,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고 하죠. 저와 함께, 그 꿈을 함께 꾸어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