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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태리 Oct 25. 2020

브런치가 꿈을 이루어준다

있는데 없다고 할 수 없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꿈이 있었다. 작은 꿈은 화섭 씨와 보드게임을 함께 할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이고, 큰 꿈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쉽게 친구 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오늘은 작은 꿈이 이루어졌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지인들 단톡 방에 공유해서 글에 대한 반응을 실시간으로 확인해왔다. 말로 만나는 것과 글로 만나는 것은 차이가 있기에 지인들도 내 글을 읽으면 반응이 다르다. 내가 워낙 다듬어지지 않은 말을 하기도 하고, 글은 다듬고 깊은 속내를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으니까.


지난번에 리처드 용재 오닐과 화섭 씨의 만남을 쓴 글이 가장 반응이 뜨거웠다. 아무래도 대중이 많이 아는 유명인이 등장하는 글이라 그런 듯하다. 글을 쓰는 나도 가을이 주는 선물인지 옛 추억이 많이 떠올랐다. 화섭 씨와 내가 만들어갔던 그 일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도 알게 되었고. 마지막 글을 쓸 때는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오랫동안 동생 화섭 씨와 내 친구들이 만난 적은 없었다. 내가 화섭 씨를 어떻게 소개할지도 몰랐고 만나서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그게  항상 마음 한편엔 짐처럼 응어리처럼 남아 있었다. 그런데, 용재가 먼저 동생과 만나자는 제안을 했을 때, 내가 원하는 게 이거였구나를 깨달았다. 내 친구들과 화섭 씨가 쉽고 편하게 만나는 것. 어쩌면 일반 사람들은 편하게 누리는 친목이 화섭 씨에게 없다는 게 마음 아팠다. 그래서 내가 친구들에게 듣고 싶은 말은 "네 동생 만나봤으면 좋겠어. 만나서 같이 놀고 싶어"였다. 그걸 글로 쓰는데 진정으로 원하는 거였는지 마음이 요동치고 눈물이 나왔다. 진정 원하는 말을 하면 온 몸에서 반응이 온다. 비폭력대화 연습하면서 진정 원하는 말을 하면 몸반응이 다르다는걸 배웠다. 그 반응에서 내가 정말 오랫동안 바래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네 동생 만나봤으면 좋겠어(1)

네 동생 만나봤으면 좋겠어(2)

네 동생 만나봤으면 좋겠어(3)


그런데, 그 대목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지인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글을 쓸 때 눈물을 흘리면, 같이 눈물을 흘리는 독자가 나타난다. 글로 하는 공명이다. 이럴 때 난 행복하다. 내 깊은 속마음과 상대가 연결된 것 같은 기쁨이 든다. 그 눈물 지인들 중 한 분이 화섭 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작은 꿈이 화섭 씨와 보드게임을 할 친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게 현실로 이루어지니 신기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니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글에 어떤 꿈을 담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사는 쌍문동 동네 카페가 모임 장소였다.


화섭 씨는 예측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미리 토요일 스케줄을 알려주었다. 너랑 보드게임을 하러 한 분이 오셔. 같이 할 수 있겠어? 화섭 씨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토요일은 화섭 씨의 서점 외출이 잡혀 있다. 규칙적으로 종로나 명동을 방문한다. 그 후에 시간으로 잡았다. 오후 3시, 브런치가 이루어준 꿈을 실현하는 날이다.


현재 가지고 있는 보드게임은 쉐이프업(Shapes Up)과 부엉부엉이(Hoot Owl Hoot!) 였다. 지인 분은 쉐이프업을 연습해오기로 했다. 화섭씨랑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정성이 고마웠다.


드디어 오후 3시가 되어 화섭 씨랑 보드게임을 가지고 약속 장소로 갔다. 화섭 씨는 기다림이 익숙지 않다. 바로 앉자마자 쉐이프업을 열어 배치부터 한다. 내가 지인에게 화섭 씨의 습관을 설명했다. 카페인지라 음료를 주문해야 하는데, 음료도 필요 없단다. 물 한잔만 달라고 했다. 화섭 씨의 주의는 온통 보드게임을 하는 것에만 꽂혀 있다. 같이 온 친구들에게 화섭 씨의 상태를 설명하고, 화섭 씨에겐 먼저 차와 빵을 먹고 시작하자고 했다. 여유가 필요해.


화섭 씨는 빵과 물도 열심히 마신다. 지인은 화섭 씨와 몇 가지 대화를 했다. 화섭 씨와의 대화법은 화섭 씨가 좋아하는 걸로 시작하면 된다. 복권 사는 게 취미여서 지인은 복권에 대해 묻는다. 언제부터 샀고, 가격은 얼마고, 무슨 요일에 사고, 얼마어치를 사는지 화섭 씨는 신나서 이야기해준다. 당첨금을 한꺼번에 받는 복권은 부작용이 크니 연금복권을 산다고 내가 추가 정보를 주었다. 지인은 그런 복권이 있냐며 자기도 연금복권을 화섭 씨 따라 사야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살뜰히 공감해주시는 지인분이 고맙다.


보드게임을 할 때 판이나 말을 잘 배치하는 화섭씨. 물건을 일렬로 나열하기 좋아하는 버릇이 여기선 재능으로 발휘된다.


그런 사전 대화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보드게임에 들어갔다. 쉐이프업은 끝까지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게 매력적이다. 박빙의 승부 끝에, 내가 승리했다. 승리의 환호성이 나온다.


나의 우승 기념 촬영! 한 판을 다 채우면 우승이다.


그다음은 부엉 부엉이로 옮겨갔다. 추천을 받아 산 게임이다. 쉐이프 업은 경쟁이 붙고, 남의 것을 빼앗아 오는 룰도 있어 게임을 하다가 복수를 부르기도 한다. 반면, 부엉 부엉이는 참여자 모두 협동을 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대화도 많이 하게 되고 서로를 칭찬할 기회도 많다. 부엉이 4마리로 첫 도전을 성공했다. 6마리도 거뜬히 도전 성공!


부엉이 6마리를 둥지에 모두 오게 하면 게잉승리! 이 게임을 할 때 화섭 씨는 꼴찌 부엉이를 잘 챙긴다. 그럴 때 약자를 챙기는 화섭 씨의 고운 마음이 보인다.


화섭 씨는 이로서 본인의 볼일을 다 마쳤으니 가겠다고 벌떡 일어선다. 이 행동 또한 지인들에게 설명해줬다. 보드게임 정리를 다 마치고, 자리를 뜨는 화섭 씨. 지인은 이런 화섭 씨의 행동이 재밌다고 한다. 무척 재미있는 친구일세... 보드게임도 재밌고, 화섭 씨도 재밌고. 낯선 사람과 이렇게 오랫동안 동석하게 해주는 보드게임이 감사하다.


나는 친구가 없으면 쓸쓸하다. 그런데, 화섭 씨는 그런 표현을 하지 않는다. 혼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친구가 없다고 투정한 적도 없다. 그게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특징일 수도 있다. 화섭 씨에게 보드게임 친구를 만들어줄 때, 항상 화섭 씨 상태를 체크하려 한다. 내 욕심에 화섭 씨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교류하게 하려고 한다. 확실한 건 화섭 씨는 보드게임을 좋아한다는 것. 같이 하자고 하면 거부를 하지 않으니까.


이 작은 꿈이 이루어진 오늘 토요일은 내 역사의 소사(小史)로 남겨놓고 싶다. 그리고, 다시 한번 브런치에 꿈을 써보겠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언젠가 꼭 이루어질 것 같다. 다음 꿈은 화섭 씨와 보드게임 카페를 운영하는 것. 언젠가 화섭 씨도 나도 은퇴 할 때, 사람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거기서 보드게임을 함께 즐기고 싶다. 장애인 친구들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비장애인들도 편하게 오는 공간. 그곳에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쉽게 친구 되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 특히 어린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많이 왔으면 좋겠다. 어릴 때부터 장애인 친구와 어울리는 경험을 많이 해보게 하고 싶다. 그 어린이들이 자라서 길거리에서, 직장에서 장애인을 만날 때도 친근함을 느꼈으면 한다.  보드게임이 그런 연결의 다리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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