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스트 글쓰기-르포 : 현장을 정직하게 담아라 3

by Newfifty

[저널리스트 글쓰기-르포 : 현장을 정직하게 담아라]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일종의 ‘사례 연구(case study)’처럼 제가 썼던 르포 몇 개를 차례로 보여드리고, 참고 말씀을 적어보겠습니다.


아래는 사회부 소속 주니어 저널리스트 시절이던 1997년 1월, ‘무속-역술 열풍’이란 기획에 포함됐던 ‘굿당 르포’입니다.




‘수려한 경관, 에어컨 완비, 봉고차량 항시 대기, 협회회원 우대…’


식당이나 호텔 광고가 아니다. 한국민속신문에 실린 '굿당(堂)'광고다. '굿당'은 말 그대로 굿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빌려 주는 곳. 예식장과 같은 개념이다.


최근 신세대 무속인이 크게 늘어나면서 이들의 입맛에 맞는 현대식 굿당이 최근 북한산 삼각산 주변, 서울과 경기도 접경지역에 속속 들어서고 있다. 도시화로 일반 가정집에서 굿을 하기가 어려워진 것도 굿당이 늘어나는 한 요인.


지난(1997년 1월) 1일 오후 경기 구리시 아천동에 있는 ‘용문 산신당’.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2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 ‘산신당’이란 간판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고급레스토랑이나 별장으로 착각할 만하다. 이 건물에는 굿을 할 때 필요한 그릇 악기뿐만 아니라 에어컨까지 완벽히 갖춘 4,5평 크기의 굿방이 9개나 들어차 있다.


각 방의 입구엔 호실 번호가 적혀 있고 철제문은 영하의 날씨를 막기에 충분할 정도로 육중했다. 때마침 4호실과 7호실에선 굿이 한창이었다. 박수무당의 바라소리에 맞춰 신들린 듯 춤을 추는 무당 뒤에서는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1995년 말에 이 굿당을 차린 무속인 양모 씨(46)는 “최근 들어 비무속인이 영리만을 목적으로 굿당을 설립, 서비스 공세를 펴기 때문에 요즘 굿당 간의 굿 유치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소음공해라는 동네주민들의 원성과 산에서 굿을 할 때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서울 근교의 산을 중심으로 굿당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지난 1980년대 중반.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 경기를 다 합쳐 40∼50개였던 것이 최근 1백50여 개로 늘었다. 각 도별로도 30∼40개의 굿당이 있으며 199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은 대부분 고급식당이나 예식장과 외관상 차이가 없을 정도로 화려한 현대식 건물들이다. 게다가 전에는 굿을 하는 쪽에서 점심식사를 전부 준비했으나 서비스경쟁이 붙는 바람에 굿당에서 점심식사 제공은 물론 반찬 가짓수 늘리기 경쟁까지 붙었다.


1979년부터 북한산의 오래된 암자를 개조한 구식 굿당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한 여주인(56)은 “개발제한구역에다 군사작전지역이라 증∙개축이 안되기 때문에 마음은 있어도 신식 굿당과는 경쟁이 안 된다”며 “젊은 무당들이 ‘왜 여기는 건물도 서비스도 이 모양이냐’고 비아냥거릴 때 기분이 무척 상한다”고 말했다.




무려 28년 전의 일이지만 새해 첫날(1월 1일)인 데다, 추운 날씨에 눈까지 꽤 많이 온 날이어서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여 현장(굿당)에 가는 이유는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사실과 생생한 장면을 담아내기 위해서입니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2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

[에어컨까지 완벽히 갖춘 4,5평 크기의 굿방이 9개나 들어차 있다]

[각 방의 입구엔 호실 번호가 적혀 있고 철제문은 영하의 날씨를 막기에 충분할 정도로 육중했다]

[4호실과 7호실에선 굿이 한창이었다]

[박수무당의 바라소리에 맞춰 신들린 듯 춤을 추는 무당 뒤에서는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9개의 굿방 중 ‘두 곳’에서 굿이 한창이었다]고 쓰지 않고, [‘4호실’과 ‘7호실’에선 굿이 한창이었다]고 서술한 것도 주목해 주십시오. ‘두 곳’보다는 ‘4호실과 7호실’이 더 구체적인 표현이죠. 현장을 담는 르포가 생생하려면,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다음 글은 2016년 11월 회사의 지시를 받고,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사망 이후 쿠바 수도 아바나 현지 분위기를 르포한 것 중 하나입니다.




(2016년 11월) 28일 오전 9시경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의 공식 분향소가 마련된 수도 아바나의 호세마르티혁명광장 인근에 도착했을 때 거대한 군중의 물결에 깜짝 놀랐다. 25일 타계한 카스트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려는 조문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새벽 3시부터 줄을 섰다” “어젯밤부터 와 있었던 사람들도 있다” “28, 29일 이틀간 조문 기간에 아바나 시민의 절반인 100만 명은 올 것”이란 얘기가 들렸다.


쿠바 국민들의 자유로운 조문 분위기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까지 카스트로의 분향소를 공개하는 ‘열린 모습’은 쿠바가 강조해 온 개혁·개방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카스트로 분향소 현장을 관리하는 쿠바 정부 관계자들의 경직된 모습과 조문객 관리에서는 뿌리 깊은 사회주의 분위기를 적잖이 느낄 수 있었다.


개혁·개방을 강조하지만 쿠바는 여전히 정치적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돼 있다. 비정부기구인 쿠바인권·국가화해위원회에 따르면 올해만 총 9125명의 정치범이 구금됐다. 2010년과 비교했을 때 4배 이상 늘어났다. 뉴욕타임스(NYT)는 “쿠바 정치범들이 예전처럼 장기 수감되지는 않지만 수 시간에서 수일까지 구금되는 경우는 많다”며 “인권단체들은 쿠바 정부가 단순히 정치범에 대한 전략만 바꿨을 뿐이라고 비판한다”고 보도했다. 외견상으론 개방의 물결을 타고 있지만 오랜 사회주의 전통은 사회 곳곳에 짙게 배어 있었다.


긴 조문 행렬에 쿠바 국민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기자 바로 앞에 서 있던 50대 남자는 “멕시코에서 왔다. 카스트로에 대해 좋은 평가도 많고, 그만큼 비판도 많은 걸 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역사적 인물이고, (그를 애도하는) 이곳도 역사의 현장 아니냐”고 말했다. 현지 여행사 관계자는 일부 미국과 유럽 관광객들이 ‘카스트로 조문’을 쿠바 여행 일정에 포함해 달라고 요청해 급하게 변경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조문객들은 5시간 이상 기다리며 카스트로 분향소에 도달했지만 행사장 관계자들은 잠시 멈춰 서서 추모의 뜻을 표시할 몇 초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앞사람과의 간격이 조금만 벌어져도 경직된 표정으로 주의를 주며 “멈추지 말고 계속 걸어가라”고 지시했다. 군복 차림에 배낭을 멘 카스트로 사진과 그 아래 진열된 수많은 훈장들, 그 옆에 도열한 의장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은 불과 5초뿐이었다.


‘카스트로의 혁명 동지’처럼 느껴지는 고령의 조문객들에게도 조문 시간은 예외 없이 적용됐다. 훈장을 단 제복 차림의 한 예비역 노인은 가슴팍을 움켜잡은 채 눈시울을 붉혔지만 5초 뒤 자리를 떠야 했다. 전직 교사인 오르단시아 산그렐 씨(70·여)는 “카스트로는 누구에겐 할아버지 같고, 누구에겐 아버지 같은 존재다. 가족이 떠났으니 슬프다”며 짧은 작별인사를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옛 사회주의국가 독재자들은 사망하면 시신이 유리관에 밀랍 인형처럼 안치돼 조문객을 맞이했다. ‘유리관 속 시신’은 죽지 않고 잠들어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카스트로 시신은 곧바로 화장됐다. 아바나 현지 관계자들은 “카스트로는 우상화를 체질적으로 싫어했다. 그는 늘 육체나 물질보다 정신과 사상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쿠바 TV들은 그의 타계를 “피델의 육체가 우릴 떠났다”거나 “그가 물리적으로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는 다소 시적인 표현으로 보도했다. 기자에겐 “피델의 사상과 정신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쿠바 아바나에서)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르포였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대표적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현지 추모 분위기를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전달하는 건 ‘겉’만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조문객 행렬 속에서 몇 시간 줄을 서서 카스트로 분향소에 도달했습니다. 그 과정을 ‘1시간째 줄을 섰습니다’ ‘2시간째 줄을 섰습니다’라는 식으로 쓰는 르포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조문 행렬 속에서 느낀 ‘쿠바의 개방과 통제의 모순된 분위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르포의 제목도 [충격과 안도 공존하는 쿠바 현장 르포 / ‘5초 조문’만 허용… 경직된 사회주의체제 머물러 / “멈추지 말고 계속 걸어라” 통제 / 카스트로, 우상화 반대 바로 화장, 분향소엔 시신 대신 영정 안치]로 나갔습니다.


굿당 같은 특정한 장소를 찾아가거나 쿠바 같은 해외로 출장을 가야만 ‘르포거리’가 있는 건 아닙니다.


때론 일상생활의 장소나 상황이 ‘르포’의 현장이 되기도 합니다.


2015년 5월 미국 뉴욕특파원으로 근무할 당시, 밤늦은 시간 통근열차를 타고 맨해튼에서 집(롱아일랜드)으로 퇴근하다가 겪은 일입니다.




“으아아아!”


(2015년 5월) 13일 오후 11시 14분(현지 시간) 미국 뉴욕 펜스테이션을 출발해 롱아일랜드 ‘포트 워싱턴’ 종착역을 향해 달리던 롱아일랜드레일로드(LIRR) 통근열차 안. 정체불명의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열차가 멈춰 섰다. 베이사이드 역을 100m 정도 앞둔 지점에서였다.


기관사석과 붙어 있던 칸에 타고 있던 기자를 포함해 30여 명의 승객은 순간 모두 어리둥절한 상태. 잠시 뒤 비명을 지른 사람은 갑자기 선로에 뛰어든 사람을 발견하고 급정거를 하려 했던 기관사로 확인됐다.


기자도 ‘철로 위를 무심코 걷다가 사망자 통계에 포함되지 말라’는 경고 포스터를 매일 보며 출퇴근하고 있지만 실제 그런 사고를 겪기는 처음이었다.


열차가 굉음을 내며 정차한 직후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열차를 멈췄습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이어서 바로 300∼400명의 승객이 탄 열차 안에 전원(電源)이 끊어졌고 에어컨도 함께 꺼졌다. 실내 조명등만 켜진 어두컴컴한 상태가 되었다. 이내 ‘답답하고 덥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승객들 모두 놀란 표정을 가라앉히고 침묵을 지키며 자리에 앉은 상태여서 뭐라고 하소연을 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스피커에서 나올 기관사의 다음 안내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실제로 약 5분 간격으로 “예상치 못한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긴장을 다소 푼 승객들은 휴대전화로 집에 사고 소식을 알린 뒤 옆 사람과 “이 시간에 누가 철로에 뛰어든 걸까”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까”라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오후 11시 46분. 기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의 백인 여성이 마침 곁을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휴대전화 배터리가 다 떨어져 간다. 충전하게 전원 좀 켤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남자 승무원은 “No(안 됩니다)”라고 짧게 대답하고 지나갔다.


몇 분 뒤 LIRR 트위터에 들어가 보았더니 ‘경찰 조사에 따른 열차 운행 지연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열차 밖에선 경찰들과 메트로폴리탄교통공사(MTA) 관계자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사고 원인을 조사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열차 안에선 적막감이 느껴질 정도로 승객들 모두 그냥 조용히 앉아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0시 4분(14일)쯤 “비상용 물을 나눠 드리겠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더니 승무원이 우유팩처럼 생긴 ‘물 팩’을 하나씩 나눠 주기 시작했다. 국토안보부의 승인을 받은, ‘5년간 보관’이 가능한, 그야말로 비상용 물이었다. 통근열차 안에도 승객 수만큼의 비상용 물이 상비돼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휴대전화를 충전하지 못해 계속 안절부절못하던 그 백인 여성이 물을 나눠 주는 승무원에게 “와인은 없나요?”라고 하자 열차 안에는 웃음이 번졌다. 0시 10분. 다른 경찰 1명이 열차 안을 돌면서 “모두 괜찮죠?”라고 물었다. 사고 한 시간이 지난 0시 19분에도 안내 방송이 “여러분의 인내심에 감사드린다”로 달라졌을 뿐 상황은 그대로였다.


경찰이나 승무원을 붙잡고 이것저것 따져 묻는 승객들은 없었다. 조용한 가운데 한 20대 아시아계 남자가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선로에 뛰어들어 열차에 치였다는 내용이 트위터에 올라와 있다”고 다른 승객에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0시 57분 그 말 많던 백인 여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열차에서 내리면 안 되나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거든요.”


그러자 승무원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정해진 사고처리 규정에도 어긋납니다. 지금은 경찰이 모든 걸 통제하는 상황입니다.”


이윽고 열차가 멈춰 선 지 두 시간도 더 지난 오전 1시 19분이 돼서야 전원이 들어오고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정차한 열차 안에서 “왜 이렇게 처리가 늦냐” “급한 일이 있어 빨리 가야 하는데 당신들이 책임질 거냐”라고 따지거나 고함치는 사람이 왜 단 한 명도 없는 걸까. 많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표정과 태도에서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란 걸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멈춰 선 열차 안에서 2시간여 동안 취재수첩에 몇 분 간격으로 안내 방송, 승무원의 행동, 사고 처리 현황, 승객들의 주고받는 이야기 등을 꼼꼼히 메모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귀가 시간은 많이 늦어졌지만 ‘의미 있는 현장’을 지켜볼 수 있어서 보람 있는 날이었습니다.

keyword
이전 23화저널리스트 글쓰기-르포 : 현장을 정직하게 담아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