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이별이란 여행을 떠날 때마다 느끼는 쓸쓸함의 극치다. 매 순간 이별하며 살고 있다고 누군가가 떠나는 날 말한 적 있으나, 그 이별과 여행에서의 이별은 엄연히 다르다. 대게의 이별은 무언가가 나를 떠나가는 순간에서 왔지만, 여행을 떠나서의 이별은 내가 무언가를 떠나면서 시작됐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것과, 매정하게 떠나온 것. 할 수 없이 아픈 것과, 일부러 아프고야 마는 것. 두 이별의 간극은 이 정도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여행은 동시에 자유이기도 하다. 반드시 이별해야 하는 순간은 없었다는 점이 그렇다. 나는 또 다른 여행, 그러니까 새로운 만남을 위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났고, 그 선택은 어쨌거나 내 자유의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이별이 시리도록 아팠다고 더욱 담담히 말할 수 있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러고 싶어서 일부러 아팠던 것이라고.
#2
평생 떠나며 살기로 한 순간, 여행과 이별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였다. 이별이 없는 여행은 불능이었고, 여행이 없는 이별은 때때로 찾아왔으나 정말 아픈 이별은 언제나 여행 중에 왔다.
무수히 떠나고 아프기를 반복한 어느 시점에는 두 단어가 정확히 같은 의미가 되더라. 당연히 이별 같은 여행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둔한 나라도 매번 아픈 것이 마냥 좋았을까. 하지만 실제로 내 모든 삶(그러니까 여행)이 이별을 가리키는 바람에 나로서는 하릴없었다. 온몸으로 느끼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역설을 그대로 외우는 수밖에.
'떠나서 이별이듯이, 평생 떠나면 평생 이별. 그래서 여행은 이별.'
여기서 드는 뜬금없는 생각.
이별과 여행이 이음동의어라면, '아프면서도 좋다'라는 문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프면서도 아프다'라고 느끼는 게 마땅할까, 아니면 좋으면서도 좋다'라고 느끼는 게 마땅할까.
#3
시가 가진 힘에 대해 뼈저리게 느낀 적 있다. 몇 년 전 아유타야를 여행하던 중에 시 같은 사람 한 명을 만났다. 며칠을 그 사람과 함께 보냈는데, 어느 날은 그녀가 내일 아유타야를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단다. 내가 가는 곳은 반대쪽이었는데, 나는 남쪽에서 여기로 온 건데 얼결에 나도 그쪽으로 간다고 했다.
먼 길을 떠나는 여정이 시작됐다. 그러는 중에는 내가 많이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여행 중 사랑이란, 아침에 살며시 끼는 안개와 같아서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깨끗이 개고 만다. 그렇게 헤어진 거다. 그 순간에는 입에 쓴맛이 남았던 것도 같은데, 한순간도 쓰지 않았던 순간은 없어서 담담히 헤어진 것이다.
태국을 떠난 지도 2년쯤 됐을 무렵, 평범한 일상의 한가운데서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이 생각났다. 나란 사람도 참 몹쓸 인간인 게,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그 사람의 목소리와 얼굴 따위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사진을 뒤적여볼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이미 완전히 끝난 인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희미하게 바래버린 그 채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잊은 건 아니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당연히 옷차림도 확실히 기억 못 하지만, 그 사람이 이따금 끄적였던 시 몇 편이 기억이 난다. 그중 두 개는 시작부터 끝까지 외울 만큼 선명하기까지 하다. 사람은 떠났고, 당연히 사랑도 사라졌는데 시만 남았다. 시처럼 왔다가 맹맹하게 사라졌는데도 그 자리에는 시가 피었다. 그래서 시는 강하다. 휘청거리는 사랑이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사람보다도 훨씬 더 강하다.
#4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함축적으로 느낀다는 점, 나름의 운율에 따라 이리저리 일렁인다는 점에서 여행은 시다. 여행이 평범한 일상보다 더 진하게 남는 이유도 바로 그런 '시'같은 특징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여행은 동시에 이별이었다. 여행이 시작되면 이별은 꼭 같이 따라오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별은 여행처럼 시처럼 오래도 남겠다.
참,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아이러니다. 자유이고, 여행이고, 이별이면서, 시. 누군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분명 절절한 시 같은 사연이 있으리라. 그리고 나도 어느 순간부터 그 절절한 사람들 중 하나가 됐으리라.
#5
떠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떠나고 싶어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자주 아프다. 여행이라서 이별이라서 그리고 시라서 그렇다. 역마살이 긍정적이지 않은, 오히려 '액'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의사 선생님에게 여행을 다니면서 몹시 아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그럼 도대체 왜 여행을 떠나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잠깐 고개를 떨궜다가, 아래 적은 세 문장을 떠올렸다.
'자유를 찾아 떠났습니다.'
'시를 쓰러, 아니 시가 되기 위해 떠났습니다.'
'이별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죄 오글거리는 대답뿐인데, 그때 떠오른 문장이 정말 그랬다.
셋 중에 하나를 대충 골라서 답하려고 하는데 입이 자꾸 멈칫거렸다. 선택지가 많다고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이, 어떤 답을 고를까 우왕좌왕 헤매고 만 것이다. 나는 그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다음에, 그냥 다음에 알려줄 테니 오늘은 여기서 상담을 마치자고 말했다.
#6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대답은 이별 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내가 워낙에 미지근한 사람인 탓이고, 때로는 쓸쓸한 사람인 탓이고, 결국에는 눈이 되고 싶었던 탓이다.
이 책에 쓰인 글, 그리고 내가 다른 글을 적은 이유도 바로 이별 때문이다. 몇 번이나 하는 말이지만, 이별은 언제나 아프다. 아파야 이별이고, 그러는 중에 가끔은 아름답기도 해야 이별이다. 찢어지는 이별의 아픔을 어떠한 수단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사무치는 고통의 상향연속 와중에도 여행을 계속되게 만드는 원동력을 찾아내고 싶었다. 적당히 따뜻한 날 내리는 눈이 되고 싶은데, 글을 적어내지라도 않으면 사람도 피해 갈 만큼 차가운 얼음이 될 것만 같아서 적으며 살았다.
#7
지금은 누군가가 "당신은 왜 떠납니까?"하고, 물으면 주저하지 않고 답한다.
"이별하기 위해 떠났답니다."
명쾌하게 떨어지는 답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렇다. 시를 쓰러 떠났다고, 자유를 찾아 떠났다고 말할라치면 자꾸 뒤따르는 질문이 온다. 그러면 나는 또 아프고 만다. 명쾌한 답을 찾아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 꼭 이별로 끝이 나서 아프고 만다.
#0
이 책은 미지근한 사람이 여행을 떠나며 만난 이별의 기록이다. 바깥은 쓸쓸하지만, 그 속은 이상하리만치 미지근한 이글루 같은 글의 연속이다. 또, 그런 글을 적으며 휘발되는 사람의 마지막 흔적이다.
스무 살, 아직 말랑했던 그 남자는 여행을 떠났더랬다, 자유를 찾아 떠났더랬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떠났더랬다, 아, 이별하기 위해 떠났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