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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Sep 16. 2020

술 좋아해?

그럼.

"술 좋아해?"라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그럼"이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건 작년 카트만두에서였는데, 너무 쓰고 속도 쓰려서 웬만해선 마시지 않는데 얼결에 그렇게 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너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곧장 편의점에 들어가서 맥주 서너 캔을 고, 맥주캔을 종이봉투로 잘 감싸서 공원으로 향했다.


길가에서 멀리 떨어진 벤치에 자리를 잡고 맥주 한 캔 반 정도를 마셨다. 이 정도면 내 2년 치 알코올 할당량이다.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이 혀를 적실 때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술은 역시나 썼다. 하지만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바라본 너의 얼굴이  해맑아서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해 질 무렵, 잔잔한 빛 내림이 메타세쿼이아 아래까지 미쳤다. 이제 슬슬 정리하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네가 다시 내 손목을 붙잡았다. 너는 큰길을 지나 골목으로, 골목을 지나 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디좁은 골목의 끝에는 작은 바가 있었다. 해가 완전히 졌을 때부터는 바에서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데낄라 샷을  가락 수보다 더 많이 마셨던 것 같다. 몇 년간 술을 거의 입에도 대지 않고 살았던 탓인지 그날 밤은 유난히도 어질했다.


비비 꼬이는 혀를 간신히 붙잡고, 휘청거리는 다리에 온 정신을 집중해서 걸었다. 뜨뜻미지근하게 불어오는 여름 밤바람이 술로만 가득 찬 속을 거세게 흔들었다. 방 안에 들어가서는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곧 새벽이 깊어지면서 바람은 차게 식었다. 침낭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베개 하나를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중간중간 화장실로 달려가서 속을 게워낸 것도 같은데 그것이 꿈이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다음날에는 9시도 채 안 돼서 일어났다. 네가 부지런히 방문을 두드린 탓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힘없이 나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왜 매일 새벽 함께하던 술친구들을 매정하게 내쳤는지, 술이라면 두 손을 휘저으며 마다했는지 어렴풋이 떠올랐다. 화장실 들어가서 찬물로 입안과 얼굴을 씻어냈다. 씻으면 씻을수록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만 같았다. 네가 또 한 번 방문을 두드렸다. 로비에서 기다릴 테니 얼른 씻고 나오란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정도로 쨍한 날씨라면 내 온몸에 찌든 알코올을 금방 날려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로비로 나갔다. 너는 하얗게 질려있는 내 얼굴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서 괜찮냐고 물었다. 너의 음성이 마치 커다란 우퍼스피커 앞에 놓인 물건처럼 옅은 진동이 되어 귓가로 들어왔다. 갑자기 속이 울렁여서 밖으로 뛰어나가 또 한 번 속을 게워냈다. 나는 물을 몇 모금 삼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 술을 정말 싫어한다고, 오늘은 아마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런데 네가 좋으면 나도 좋다고, 나쁘긴 했는데 그렇게 막 나쁘지는 않았다고.


너는 우왕좌왕하는 나를 끌고 택시 올라탔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는 물음에는 병원엘 가지 어디를 가겠냐고 답했다.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지 왜 거짓말을 했냐고 타이르기도 했다. 병원에 가서는 정맥주사를 팔에 꽂고 한동안 침대에 누워있었다. 몇 번이나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럴 때마다 가 옆에 있어서 참 좋았다. 지나치게 아파서, 또 지나치게 좋아서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다. 너와 평생을 함께 살면 매일 아침이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가, 너무 설레발치는 것 같아서 다시 눈을 감았다. 너와 있는 동안 나는 매일 술을 마실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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