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모든 기억을 짊어진 그 날의 몸뚱이가 유난히도 무거워서였다. 간신히 트렁크에 배낭을 싣고 여독으로 찌든 몸을 택시 뒷좌석에 뉘었다. 나지막이 주소를 부르고 가까스로 눈을 감았는데, 기사 아저씨가 물었다. "짐이 단출하네요. 배낭여행을 다녀오셨나 봐요?" 나는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사람을 찾으러 여기저기를 다녀왔는데, 지금 택시에는 기사님이랑 저랑 둘만 타 있네요. 여행이 잘 끝나지 않았나 봅니다." 머쓱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어슴푸레 들려오다가 어느 순간 멎었다.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택시가 서울 시내에 진입하고 나서였다. 눈을 깜박거리며 곁눈질로 휴대전화를 살펴보니 각종 알림이 화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 후로도 웅-웅 몇 번의 진동이 더 울렸고, 곧 택시도 멈춰 섰다. 창문 밖으로 낯익은 풍경이 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나야 이 삭막한 골목을 벗어날 수 있을까. 힘없이 택시에서 내려서 원룸촌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시선은 자꾸만 반쯤 찢어진 운동화 한 짝을 향했다. 한참을 걷다가 목이 뻐근해서 고개를 들었는데, 골목 한 귀퉁이에 못 보던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었다. 멀쩡한 커피를 마셔본 지도 참 오래다. 방향을 약간 틀어서 카페로 들어갔다. 잠이야 이제 며칠이고 잘 수 있으니 조금 늦어진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빈자리에 앉았다. 매장 안에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좀도둑은 찾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는 화장실에서도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났다. 이처럼 평화롭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몇 달 동안 몸에 밴 긴장을 풀고 한껏 느즈러져 있으니 진동벨이 울렸다. 커피를 받아와서는 에스프레소를 곧장 한입에 들이켰다. 갑작스러운 카페인 폭풍에 머리가 잠깐 어질했다.
카페인에 취해서인지, 잠에 취해서인지 한껏 몽롱해진 정신이 꿈과 현실 사이를 헤엄쳤다. 카페에서 나와서 집에 도착하는 꿈을 꿨다가, 그다음에는 다시 긴 여행을 떠나는 꿈을 꿨다. 그날 대낮에 만난 반쪽짜리 지각몽은꽤 산뜻했다. 하지만 정신이 제자리를 찾을 때마다 느껴지는 누군가의 빈자리는 점점 휑하게 드러나서 그곳에 커다란 찝찝함이 가득 들어찼다. 혼자서 떠난 여행이라 혼자 돌아오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만,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이 괜히 섭섭하다. 과제를 하는 건지 한쪽에 모여있는 대학생들의 웃음소리가 테이블을 넘어 아스라이 들려왔다. 잠깐 학교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가, 부르르 떨며 마음을 접었다.
여행의 끝은 시작과 중간만 못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어쩌면 빈약한 마지막이 여행을 계속되게 만드는 원동력일 수도 있다. 너무나 보잘것없는 결말에 아쉬워하다가 새로운 여행을 떠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여행에 중독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결말, 기대에 찬 시작, 아쉬운 결말, 기대에 찬 시작… 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여행자들은 곧잘 텅 비고 만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는 왜인지 불쾌한 감정들과 아쉬움이 꽉 들어찬다.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것이 아닌, 떠날 수밖에 없어서 떠나는 최초의 순간. 그 순간을 나는 역마살이 사람을 집어삼킨 최초의 순간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고달픈 신세의 폭풍을 한껏 맞아보기로 했다. 떠나지 않고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순환의 고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평생을 꿈꿔온 '여행 같은 삶과 삶 같은 여행'이 완성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그 고리가 끊어지면 나는 죽는다. 살아있으면서도 죽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