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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Sep 15. 2020

마가 뜨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공허한

빈에서는 클림트와 그의 애인이 즐겨 찾았다는 어느 카페에 들렀다. 히틀러 역시 종종 드나들었다는 사실이 조금 찝찝한 느낌을 주었지만, 내게 미움받을 용기를 준 아들러도 단골이었다고 하니 적당히 공평하다. 고풍스러운 카페의 입구는 모피코트를 입은 아주머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 많은 코트를 밍크의 수로 환산하면 적어도 3,000마리는 되리라', '설마 저게 다 동물 털이겠어'같은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으니, 직원이 나를 불렀다.


아인슈페너 한 잔을 시켜놓고 가만히 앉아 그 공간이 주는 울림을 느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 사이로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나는 그가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중일 수도 있다. 클림트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펼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깨고 싶지 않은 달큰한 상상이었는데, 커피잔이 비어버리는 바람에 하릴없었다. 한 잔을 더 마시기에는 좀이 쑤시고, 숙소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음 행선지는 한 군데로 추려진다. '벨베데레 궁전' 그래, 클림트를 제대로 느끼려면 클림트의 손길을 직접 눈으로 봐야지 않겠는가.



길 건너편으로 링 바깥을 도는 2번 트램이 보여서 잠깐 고개를 돌렸다. 벨베데레 궁전까지는 대략 3km. 겨울바람을 맞으며 걷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편도 3,000원짜리 트램을 타기도 뭐한 거리다. 값비싼 입장료를 생각하면 걷는 게 백번 옳다마는, 얼어붙은 손발을 무시하는 것도 주인 된 도리로서 못할 짓이 아닌가.

나도 모르는 새 트램 정류장까지 걸어갔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는 거리야말로 내가 정말 있어야 하는 곳이다.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한껏 움츠린 채로 거리를 걸었다. 오전 내내 퍼붓던 함박눈이 그친 것만으로 는 충분히 운 좋은 사람이라, 스스로 위안했다.


궁전에 다 와서는 곧장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그림이 전시된 상궁으로 들어갔다. 건물을 가로지르던 중에 다비드의 나폴레옹이 보였던 것도 같은데, 나폴레옹은 항상 나중의 일이다. 내가 벨베데레 궁전에서 읽을 수 있는 색은 화려한 금빛이 전부다. 따뜻한 조명이 내는 열기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온기가 정말 조명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황금빛 후광 아래서 입을 맞추는 연인이 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은 오늘도 무한한 하늘이었다. 아무런 단서가 없는 그림의 배경이 마치 우주와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리라.


그림 뒤에 숨어 시간을 흘렸다. 시간이 흐른 것은 분명한데, 그 양이 얼마만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이 정도로 적는 것이 가장 낫겠다. 황금빛 분위기를 따라 위아래로 대류하던 공기가 잠시 멈췄고, 멈춘 채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나를 다시 현실 세계로 돌려놓은 것은 다름 아닌 욱신거리는 발목이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무엇보다 클림트의 그림이 눈앞에 있는데 그깟 통증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지다니, 참으로 원망스러운 몸뚱이다. 차라리 트램을 탈 걸 그랬다.



그림을 다 보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펼쳐진 바로크 건축물과 그 사이를 채우는 프랑스식 정원으로 눈발이 아찔하게 나부꼈다. 그 풍경이 어찌나 예쁘던지, 숨이 멎을 정도로 목이 메어왔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촉촉한 감정에 젖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나와 동질감이 느껴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함께였고, 눈송이도 서로 엉기어 쏟아졌다. 오늘따라 그림은 왜 그리도 아름답고, 눈 내리는 풍경은 또 왜 그리도 예쁜 건지 조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복받치는 감정을 혼자서만 느끼고, 또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별과 만남 사이에는 어떤 사람도 없이 홀로 견뎌내야만 하는 절대적 외로움의 기간이 있다. 나는 그 쓰라린 고독의 기간을 '마가 뜨다'라는 방송용어로 표현하곤 한다. 맨트와 맨트 사이, 아무런 소리 없는 침묵의 공간이 생겼다는 의미다. 아무도 없이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는 점과 그 기간이 길어지면 사고로 이어진다는 점이 여행 중에 생기는 외로운 기간과 퍽 비슷하다.


마가 뜨는 순간에 나는 곧잘 아프고 만다. 정신이 어질 거리면서 무기력해지고, 검은색 감정들이 온몸을 달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마'는 감정이 겪는 열병이다. 하지만 빈에서 앓았던 열병은 다른 열병과 조금 달랐다. 더 많이 아팠고, 더 많이 울었다. 단순한 이유를 찾아보자면, 지나온 내 여행에서 가장 길게 마가 떴던 순간이었기 때문이겠다.


불덩이가 된 몸을 질질 끌고 쓸쓸히 궁전을 빠져나왔다. 길 건너편에 2번 트램이 멈춰 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타지 않을 것이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지려면 차라리 몸이 힘든 게 더 낫다.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곧 담배를 든 왼손이 꽁꽁 얼어서 벌겋게 변했다. 차가운 왼손이 다른 누군가의 오른손과 맞닿아 있었다면 이 정도로 얼어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눈 내리는 빈의 밤거리는 넘치게 아름다웠다. 발목이 또 한 번 욱신거렸다. 조금 덜 춥고, 조금 덜 아름다웠다면 이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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