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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Oct 07. 2020

아무것도 하지 않기

행복은 한 번도 날 떠난 적이 없다. 내가 애써 모른척했을 뿐.

햇볕이 따가운 대낮에도, 으스스 한기가 느껴지는 새벽에도 그는 항상 같은 돌덩이 위에 같은 자세로 앉아 짜이

를 마셨다. 그와 처음 대화를 나눈 것은 바라나시에 도착한 지 일주일쯤 되던 날이었다. 짜이집으로 몰려온 순례자들이 얼마 되지 않는 자리를 모두 차지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유리잔을 들고 돌덩이 위로 올라가야 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을 본 그는 무심한 듯 내 짜이 잔을 받아 들고, 비틀거리는 나를 돌덩이 위로 잡아 올렸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그 남자였다. "내가 왜 이 돌덩이 위에서 잘 안 내려가는 줄 알겠죠? 오르내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 근데 풍경은 참 좋아요." 그 후로도 별 의미 없는 따분한 대화가 오갔다.


다음 날에도 나는 끙끙거리며 그 돌덩이 위로 올라갔다. 주변에 빈자리도 많았는데, 돌덩이 위에서 본 풍경이 그 아래와 크게 다른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그러고 싶었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그의 머리칼에서 나는 기분 좋은 향냄새 때문일 수도 있겠고, 미간에 깊게 골이 팬 그의 주름살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날은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위에서 본 풍경이 좋아서요." 그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번 침묵이 흘렀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경은 있던 말도 잃게 하기에 충분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이번에도 그 남자였다. "곧 있으면 해질 시간인데, 보트 타러 가실래요?" 한참 고민하던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그 이유를 물었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생각이 정리되면 알려주겠다고 답했다. 황당한 듯 씩 웃는 그의 이마에 다시 한 번 주름살이 생겼다.


그를 또 만난 것은 그 후로 일주일쯤 지난날, 골목에 있는 작은 찻집에서였다. 그는 반갑게 인사하며 보트를 타지 않은 이유를 찾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잠깐 뜸 들이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트를 타지 않은 첫 번째 이유는, 어차피 오래 있을 건데 나중에 타도되겠지, 하는 귀찮은 마음 때문이었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하고 나면 바라나시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더라고요. 한 번에 끝내기는 아쉬운 곳이잖아요. 두 이유 모두가 결국에는 바라나시에 오래 머물고자 하는 제 마음에서 나온 거죠."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깐 대화가 멎었다가, 다시 흘렀다.


"아직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잖아요?"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한참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러자 그가 답했다. "이번이 제 열두 번째 바라나시예요. 햇수로 따지면 한 오 년쯤 됐겠네요. 저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바라나시에 와요. 주변을 둘러봐요. 그럴만한 가치가 있잖아요."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나는 조금 더 생각하다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질리면 어떡하죠?" 그는 웃으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가트에서 멍만 때리기에도 너무나 바쁩니다. 바라나시에 왔으면 하루를 마치고 되돌아봤을 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런 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나를 처음으로 돌아가게 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무'의 상태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앞으로의 삶을 재정비하기 위해 바라나시에 왔다. 미치도록 따분한 삶에 치이고 또 치이다가 마지막으로 찾아온 곳이 바라나시라는 이야기다. 굳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바라나시에 더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바라나시는 뭔가를 하지 않기에도 이미 너무 바빴고, 아무리 바쁘게 움직인다고 해도 항상 할 일이 남아있는 그런 곳이었다. 어렴풋이 꿈꿨던 영적인 구루는 가트 위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따분하게만 느껴졌던 골목길이 다시 살아 움직였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바라나시가 부린 작은 마법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아래층 할머니가 만드는 커리 냄새,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원 따뜻한 공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 점심시간인 모양이다. 습관처럼 캘린더를 훑었다. 여행은 아직 많이 남았다. 단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안도감에 가만히 누워있어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적어둔 일정과 알람 따위는 몽땅 삭제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별 쓸모도 없는 일이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어제, 또 그제와 같은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강가가 흐르는 가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객꾼은 가뿐히 무시하고, 달려드는 걸인들에게는 주머니에 남은 동전들을 모두 털어서 건넸다. 한참 한적한 가트를 찾아다니다가, 돌덩이 위에서 짜이를 마시는 아저씨가 보여서 그 옆에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래도 괜찮았다. 잠시 강가를 보며  의미 없는 생각을 하다가, 지금 이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만트라 음악을 틀었다. 아저씨가 씩 웃으며 머리칼을 날렸다. 어제와 다른 향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어제 심혈을 기울여 고른 책을 첫 장부터 천천히 읽었다. 역시나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원숭이들과 비스킷 한 조각 주워 먹으려는 개들이 낑낑대는 바람에 집중은 잘 안 되었다.


잘 읽히지도 않는 문장과 서너 시간 씨름하다, 며칠 전 골목을 지나다 눈여겨본 탈리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식당에 도착해서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80루피짜리 베지 탈리를 시키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5분짜리 노래가 끝나고, 3분짜리 노래가 중간을 지날 때 주문한 탈리가 나왔다. 배가 고플 때면 여지없이 한국에서의 버릇이 나타난다. 10분도 채 안 돼서, 큼지막한 쟁반 위의 탈리를 빨리빨리 해치우고 말았다. 골목은 벌써 컴컴해져 있었고, 라씨 아저씨는 퇴근을 준비했다. 어두운 골목이 낯설어 방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흐르는 시간이 아까워서 다시 가트로 걸었다.


노란 가로등 불이 켜진 가트 위에 앉아, 껌껌한 갠지스강을 바라보며 짜이 한잔을 마셨다. 그러고 나서는 강과 가트가 만나는 맨 아래까지 내려가, 그나마 깨끗한 돌계단 위에 주저앉았다. 여기가 내 자리니까. 감성이 터져 새어 나오는 노래 몇 곡을 틀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잠깐 웃다가 울기 직전까지 갔는데, 너무 궁상떠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골목께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을 사는 개와 저녁을 사는 개는 완벽히 다른 생명체다. 더 늦었다가는 병원에서 광견병 주사를 맞으며 하루를 마칠 수도 있다. 가파른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 게스트하우스를 향해 걸었다. 혹시나 해서 저 멀리 골목길 안을 들여다봤다. 라주 아저씨네 슈퍼에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에 슈퍼로 달려가 싸구려 과자 몇 봉과 림카 한 병을 샀다. 이제 정말 들어가야 한다. 밤이 더 늦으면 원숭이들도 사나워진다.


불이 다 꺼진 걸 보니, 내가 꼴찌로 들어온 모양이다. 살금살금 자물쇠를 따고 방으로 들어가, 이틀 동안 공들여 받아 놓은 영화 한 편을 틀었다. 영화가 다 끝나갈 때쯤, 아까 사둔 과자와 음료수가 생각나서 허겁지겁 가방을 열었다. 다행히 림카는 아직 시원했다. 졸린 눈 껌뻑거리며 애쓰고 있자니, 타이밍 딱 맞게 영화가 끝났다. 너무 늦어서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를 되새기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이건가? 이게 행복인가?' 

행복을 찾겠다며, 오래도 헤맸다. 이번 여행도 어떻게 보면 행복을 찾기 위해 떠난 것이니까. 근데 아무것도 안 한 평범하고 따분한 하루의 끝에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다니 이상한 일이다. 아직 목적지에 다 오지도 못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행복을 찾아 굳이 먼 길을 떠나올 필요가 있었나 싶다. 행복은 한 번도 날 떠난 적이 없었으니까, 계속 내 눈앞에 있었는데 내가 애써 모른척했을 뿐이니까. 


그날 잠결에는 평생 여기저길 떠다니며 행복에 겨워 있는 내 모습을 봤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커리 냄새와 동시에 꿈인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꿈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또 한 번 행복한 아침이다. 나는 오늘도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거짓말처럼 따뜻한 기운이 주변을 휘감았다. 바라나시가 조금 더 큰 마법을 부린 것이다. 앞으로 바라나시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또 그게 백번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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