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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Oct 16. 2020

그러니까, 왜 글을 쓰기 시작했냐면…

적으며 사는 삶.

"혹시 노트랑 펜 있으세요?"

네가 나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골목 깊숙이 숨겨진 작은 탈리 집이었고, 너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뚫어지게 네 얼굴을 바라보다가 딱 걸린 나는 화들짝 놀라서 가방을 뒤적였다. 하지만 가방을 뒤집어 탈탈 털어도 매일 그 자리에 있던 이면지 쪼가리와 볼펜은 나오지 않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없는 것 같다고, 그런데 다시 한 번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너는 별일 아닌 듯 손을 휘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근데 나에겐 그게 별일이 아닌 게 아니어서, 새하얀 종이 한 장과 볼펜이 그렇게 얄미웠다. 허무하게 날려버린 너와의 첫 대화도 대화였거니와, 내게 말도 안 하고 사라져 버린 두 녀석에 대한 배신감도 한몫했다.


탈리 집을 나와서 곧장 수제노트 가게로 향했다. 네가 나에게 다시 노트를 빌릴 일이 있겠느냐마는, 마침 남은 여행을 위한 노트 한 권이 필요했던 터라, 근사한 노트 한 권쯤 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뭐, 또 우연 속을 지나다가 어떤 근사한 사람에게 노트 한 장을 찢어 건넬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더없이 좋은 일이고 말이다. 가게에 들어가서 이 노트 저 노트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노트를 구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노트는 크기가 마음에 안 들었고, 크기가 적당한 노트는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주인아저씨의 눈치를 살피며 가게를 떠나려 하는데, 눈앞의 작은 노트 한 권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색깔도 가맣고 튀지도 않는 것이 내 취향과 퍽 맞았다. 걸음을 돌려 그 수첩을 가리키며 가격을 물었다. 아저씨는 당황해서 몇 번 고개를 흔들더니, 그 노트 한 권만은 절대 팔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이 지금 사용하는 노트라서 그렇단다. 순간 그 노트를 꼭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른 노트를 사도 됐는데, 그냥 피가 끓어서 그랬던 거로 해두자. 내가 하지 말라면 꼭 하고야 마는 전형적인 엄마 말 안 듣는 사람인 건 비밀이라 그렇다.


아저씨와의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아저씨는 이 노트는 너무 낡고 벌써 사용한 것이라며 다른 노트를 권했고, 나는 가격이 얼마가 됐건 괜찮으니까 꼭 그 노트를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100루피를 불렀고, 200루피, 심지어 500루피를 불러도 아저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저씨의 표정이 단호해질수록, 그 노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더 견고해져만 갔다. 잠깐 심호흡을 하고 1,000루피를 불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내 하루 여행경비와도 맘먹는 금액이라 더 쓸 수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아저씨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이 노트를 사려면 적어도 1,500루피는 써야 한다고 말했다. 


주머니에 있는 돈 전부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아마 1,300루피 정도 됐을 것이다. 나는 이게 내가 가진 돈 전부라고, 더 주고 싶어도 못 준다고 애원했다. 도수가 높은 돋보기를 껴서 눈알이 개구리처럼 빛났던 아저씨는 잠깐 고민하는 척하더니 노트를 포장지에 남았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오천 루피를 줬어도 아깝지 않았는데, 그때는 백 루피 이백 루피에도 손이 벌벌 떨렸다.


노트를 가방에 넣고 가트로 돌아갔다. 미지근한 햇살을 받으며 개들에게 비스킷을 던져주고 있는데, 갑자기 심심함이 밀려왔다. 아무 걱정 없이 심심함을 느끼는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낙 중에 하나지만, 왠지 모르게 그때의 심심함은 견디기 어려웠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가방을 뒤적였다. 가방에 항상 넣어두던 책 한 권도, 어쩐 일인지 휴대전화도 들어있지 않았다. 문득, 지난주 가방 정리를 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무릎을 쳤다. 종이와 펜이 없던 것도, 심심함을 달래줄 물건이 없던 것도 모두 그 청소 탓이다. 하는 수 없이 가방 맨 아래 덩그러니 놓여있던 작은 수첩과 서비스로 받은 볼펜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적었다. 오늘의 공기, 오늘의 날씨, 오늘의 기분, 오늘 점심으로 먹은 것들, 오늘 가트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뭐 그렇게 적을 이야기가 많았는지는 모르겠는데, 해가 질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적었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던 일이 떠올랐고, 그 사람을 만난 일, 무리해서 노트를 샀던 일, 마지막으로 수첩에 글을 적었던 일이 떠올랐다. 탈리 집에 떨어뜨린 진한 아쉬움 빼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였다. 특히 가만히 앉아 글을 적었던 기억의 여운이 오래 머물렀다. 시험지의 딱딱한 답안 말고는 짤막한 문장도 써 본 적 없는 나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꽤 낯설고도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내가 무슨 글을 쓰겠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앉아 빈 종에 끄적이는 글씨가 퍽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날 저녁에도 나는 노트를 폈다. 무언가에 꽂히면 거기에만 열중하는 미련한 사람이라 그렇다. 봤던 드라마를 열 번이 넘게 또 보고, 마음에 드는 책은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는 미련한 사람인데 더 말해 무엇할까. 다음 날 가트에서도, 그 다음 날 카페에서도 글을 적었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 '어, 이거 사진보다 더 나을 수도 있겠는데?' 


사진을 찍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사진감정을 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내 실력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겠고, 사진이라는 것이 평범한 일상을 담는 기록의 수단으로 적절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영상을 기웃거렸다가, 그림을 그렸다가,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사진에 열중할 때에, 쓰는 일이 찾아온 것이다. 내 필력이 지나치게 보잘것없다는 게 조금 신경 쓰였지만, 어디 내놓으려고 쓰는 글은 아니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무리 봐도 글을 쓰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었다. 아마 그즈음에 나는 평생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던 것 같다.


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통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 적당히 짜릿하고 때로는 고상하기까지 한 취미를 즐기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어울려 다닐 수 있겠는가. 첫째로 취향이 바뀌고, 둘째로 카메라 가득 들어찼던 좁은 방의 풍경이 바뀌고, 셋째로는 생각하는 순서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글이란 요망한 것은 언젠가부터 나를 쓰지 않으면, 그리고 읽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아, 그리고 근사한 시를 쓰는 사람과 같이 걷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또 그런 글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얼마나 설레고도 설레는 사람들인가. 그래서 참 다행이다. 글을 쓰게 되어서, 삭막했던 마음 한편에 설레는 눈발이 휘날리게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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