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gillness Oct 25. 2020

인크레더블 인디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곳,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인디라간디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6시간 넘게 귓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이어폰을 빼내었을 때, 승무원이 착륙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시작했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벌써 복도로 나와 선반 위에 올려둔 짐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옆자리 아저씨의 등쌀에 못 이겨 복도로, 그다음에는 곧장 비행기 밖으로 떠밀렸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공항 직원에게서 어색한 향신료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그의 뒤통수 너머로 델리 공항의 상징인 수인이 보였다. 지나온 나날을 돌이켜보매 이토록 간절히 바랐던 순간은 없었다. 문득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서, 눈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생각만 해도 벅차오르는 여행의 시작은 어쩌다 마주친 사진 한 장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때는 아리도록 차가웠던 2015년 2월, 고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어느 따분한 수업시간으로 돌아간다.




미지근한 침 한 방울이 손등에 내려와 앉았다. 나는 소리를 내지르던 선생님과 필기하는 친구들 사이에 앉아 멍하니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쩡하게 하루를 보내는 이들 사이에서 크게 겉도는 것이 그때 내 일과였다. 네이버 메인 페이지를 열어두고 무심하게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그날도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무엇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감기는 눈을 크게 치켜떠가며 몇 번이고 버튼을 더 눌렀다. 그 순간에는 지구에 외계인이라도 쳐들어왔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집중이 흐트러진 대략 이백쉰여덟 번째 클릭에서,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어느 블로그 포스팅을 클릭해 버렸다. 평범한 여행가가 자신의 인도 여행이 얼마나 힘들었나에 대해 푸념하는 글이었다. 쏟아지는 글씨를 곁눈질로 훑어가며 대충 화면을 닦듯이 쓸어내렸다. 아마 중간중간 딴생각을 했을 것이고,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도 몇 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크롤이 블로그 맨 끝에 다다르기 직전쯤,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허공을 떠다니던 생각과 반쯤 굽어 있던 허리까지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왜인지 자꾸만 시선을 잡아끄는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다시 포스팅의 시작으로 돌아가서 아주 천천히 글을 읽었다. 사진의 장소는 힌두교에서 가장 신성한 도시인 바라나시라고 했다. 심장의 울림이 몸뚱이의 말단까지 다다라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처음 느끼는 긴장감이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좀처럼 열리지 않던 입에서는 '바라나시'라는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황사철 희뿌연 유리창처럼 희미했던 인생에서 처음으로 뚜렷한 형체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날 나는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수업시간 동안, 언젠가 꼭 바라나시에 다녀오겠노라고 다짐했다. 어떠한 몸부림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가슴속의 허기가 순식간에 가득 차서, 자못 넉넉한 형편이 되었다.


이 사진은 내가 인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때 우연히 만난 그 사진은 아무리 애써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분위기는 얼추 비슷하다.




시간은 또 금세 흘러, 한국에는 희미한 눈발이 날렸던 2018년 12월 17일. 나는 희뿌연 매연으로 가득찬 고돌리아 교차로에 있었다.


듣던 대로 소, 개, 염소 등 온갖 동물들이 널따란 편도 4차선 도로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호릿한 거지들과 사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몸짓으로 내게 빈 깡통을 들이밀었다. 주변을 둘러볼라치면 김이 잔뜩 서린 안경을 끼고 있는 것만 같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실라치면 산소보다 먼지가 더 많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길 한복판에 멈춰 서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사방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 때문이다. 곧장 가트로 내려갈까 하다가,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가장 앞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쩌렁쩌렁 울리던 경적 소리가 멎었다.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커다란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자근자근 나를 따라다니며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었던 체증도 찰나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구글 지도도 통하지 않는 거미줄 같은 골목길을 한참 헤맸다. 골목의 끝에는 또 다른 골목이 있었고, 또 다른 골목의 끝은 여러 갈래로 나뉘는 수많은 골목으로 이어졌다. 반쯤 포기한 채로 눈앞에 보이는 아무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갔다가 터무니없는 가격 때문에 다시 골목으로 나왔다. 그리고 또 헤매기를 반복. 만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이제 막 여행이라는 마취제에서 깨어나는 중이어서 더욱 고달팠다.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득히 먼 골목의 끝을 바라봤다. 활활 타오르던 여행의 열기가 한풀 꺾였다. 빙 돌아가는 길이 어쩌면 가장 빠른 길 일 수도 있다지. 그냥 조금 돌아가기로 했다. 바로 가는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긴장을 풀고 한껏 느즈러졌다. 엄마에게 볼기짝을 얻어맞는 아이를 보고 잠깐 웃었다가, 눈을 씰룩거리며 말 거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제야 정겨운 골목길 풍경이 마음으로 와 닿는 것 같았다. 다시 일어나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리고 그때, 하늘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너무나도 유창한 한국말로 말을 걸어왔다.

.

"안녕하세요! 지금 어디 가세요?"

"기타페잉 게스트하우스 찾고 있는데 잘 보이지 않네요."

"아~ 기타페잉, 쭉 직진하다가 좌회전하면 나올 거예요."

.


사람 냄새 잔뜩 풍기는 그의 몇 마디에 체온이 잠깐 올랐다. 사람이 아니면 헤쳐나갈 수 없는 미로 안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따듯한 나라에서 처음 이야기를 나눈 따듯한 사람을 음미했다. 그러다가 다시 멈칫. '방금 그 사람 인도 사람 아니었나?' 내가 헛것을 본 건가 착각이 들 만큼 그의 발음과 억양은 완벽했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생각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곳,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 그래서 인도고, 그래서 바라나시.'


그의 말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기타페잉 게스트하우스'라고 적힌 간판이 보였다. 그리고 그 맞은편 벽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인크레더블 인디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내가 좋아했던 그때의 바라나시,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그때의 나.


평생 자극에 둔감하게 반응하며 살아왔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친구들이 좋아했던 게임이나 운동, 숱하게 저질렀던 일탈 따위는 나를 설레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마음속 어딘가가 바싹 메말라,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던 나에게 뜻밖의 강한 자극이 찾아왔다. 첫 번째는 여행이었고, 두 번째는 사진이었으며, 세 번째는 글을 쓰는 행위였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던 자극은 여행이었다.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하면서 설렐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짜릿한 일이었다. 지금부터 쓰일 이야기는 나에게 처음으로 설렘이라는 감정을 가르쳐준 여행과 그런 설렘을 처음으로 느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