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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Oct 11. 2020

'쨍그랑' 유리가 깨졌습니다.

한겨울 남쪽 나라에서 다리에 힘이 풀렸던, 어느 맹맹한 사람의 이야기.

계단에서부터 현란한 시타르 소리와 둔탁한 따블라 소리가 들렸다. 비벡은 음악에는 취미가 없다고, 차라리 그림을 보겠다고 말하는 나의 손을 끌고 옥탑에 꾸려진 작은 공연장으로 향했다. 귀가 심심할 때면 가끔 인도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엇비슷한 가락을 세 시간 넘게 들을 자신은 없었다. 나는 뾰로통한 표정을 하고 먼지 풀풀 날리는 멍석 위에 앉았다. 아름다운 연주가 이어졌다. 삼십 분에 한 번쯤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무용가가 무대 위로 올라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따분함에 못 이겨 온몸을 비틀었다. 눈을 감을라치면 비벡이 흔들어 깨웠고, 자꾸만 울려대는 휴대전화도 그가 가져갔다. 옴짝달싹 못 하고 고개만 틀어서 공연장을 훑었다. 모두가 숨죽여 공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연주가 멈추면 박수를 쳤고, 연주가 다시 시작되면 움직임을 멈췄다. 재밌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저 그런 따분한 공연장이었다.


비벡에게 귓속말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 말하고 계단으로 나왔다. 이대로 도망가면 그가 단단히 삐질 것이라, 조금만 시간 죽이다 들어갈 참이었다. 닳고 닳은 돌계단에 허리를 쭉 뻗고 누웠다. 잠깐 눈을 붙일까 하는데, 옅은 숨소리가 들려서 벌떡 일어났다. 소리를 따라 올라간 계단 맨 위에는 사람 한 명이 엎드려있었다. 그곳은 멀쩡한 사람이 잠을 청할만한 곳이 아니어서, 흔들어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엄마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오랜만에 듣는 모국어에 한동안 당황하여 있다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왜 여기서 주무세요?" 그녀는 늘어난 고무줄로 머리를 묶으며 답했다. "공연이 너무 길어서요. 두 시간 전에 시작했는데 아직도 저러고 있네요. 도망가기는 좀 그렇고 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겠다고 말하고 계단을 다시 걸어 내려가는데, 그녀가 팔목을 잡아끌었다. "재미없어서 나오신 거죠? 여기 같이 계시면 안 될까요? 너무 심심해서." 


갑작스러운 열기에 얼굴이 붉어졌다. 마침 문이 닫혀 어두워졌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화끈거리는 얼굴을 여기저기 다 비출뻔했다. 나는 그녀가 있는 계단 서너 칸 아래에 멀거니 앉아,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벽을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려 해도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숫기 없는 내가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일부러 대꾸하지 않은 게 아니라, 뭐라 답하기에는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여서 그랬다. 다섯 번째 공연이 막을 내리고, 마지막 연주자들이 무대로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들어가지 않으면, 보나 마나 비벡이 토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막 그녀가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이 좋아서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 좋아하기에는, 그 수가 몇 되지 않아서 더 많은 사람을 찾아 돌아 돌아 인도로 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끔은 사람 때문에 아플 때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 온기로 앓았던 마음이 금세 나아진다고 했다. 따뜻한 사람을 길을 걷다 우연히 한 번 더 만나게 되면 그때는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단다. 그녀의 목소리가 마냥 밝기만 해서,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사람이 버거웠다고,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투성이라 마음을 열어본 적조차 없다고, 싫어하는 사람과 싫어하지 않는 사람만 있지 좋아하는 사람은 딱히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그 온도 차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서너 뼘 거리에 있는 그녀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오랫동안 나란히 걷고 싶은데, 그녀는 마주 보며 가까이 오는 사람이라 그랬던 것 같다. 점점 가까워지다가 언젠가는 스치고 지날 사람이라 그래서 커다란 벽을 쌓은 것이다. 문밖에서 시끄러운 박수 소리가 들렸다. 공연이 끝난 모양이다. 바지를 털고 다시 공연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어디 갔다 왔느냐는 비벡의 물음에는 자리가 없어서 맨 뒤에 서서 공연을 봤다고 말하는 게 가장 낫겠다. 쉽게 떠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터벅터벅 걸으며, 기회가 되면 나중에 또 보자고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질문에 다시 한번 얼굴이 붉어졌다.


"우리 그러면 내일은 골목에서 만날까요, 조용한 가트는 어때요, 그것도 아니면 중간에서 만나는 건 어떤가요?"


이래서 마냥 밝은 사람과는 잘 통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온기에 나만 흠씬 젖어들 텐데, 젖었다가 마르면서는 어지간히 덜덜 떨 텐데, 일렁이는 마음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한동안 문고리를 잡고 생각했다. 싫다고 하기에는 내가 너무 무른 사람이었고, 좋다고 하기에는 벌써 아팠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문을 열어젖히며, 다음에 보자고 내일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서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는 길에는 아까 떠올렸던, 그녀와 나의 온도 차에 대해 생각했다. 만나기 위해 떠나는 사람과 떠나는 것이 두려워 만남을 주저하는 사람의 온도 차는 얼마나 클까. 그녀가 팔팔 끓기 직전 물의 온도라면, 나는 영도 아니, 절대 영도겠지. 괜히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이 지나고 나서도 몇 번이나 그녀를 만났다. 나는 여간하면 피하고 싶었는데, 그 사람은 이따금 나를 찾았던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같이 차를 마시고 밥을 먹었다. 하지만 하루에 차를 마시고 또 밥을 먹는 날은 없었다. 밥을 먹는 날에는 밥만 먹고, 차를 마시는 날에는 차만 마셨다. 어차피 좁혀질 거리라면, 그 끝을 되도록 늦게 보겠다고 얼마간 애쓴 것이다. 끝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시간이 흘러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가끔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억지로 짓눌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는 같이 가트에 앉아 짜이를 마시는데, 문득 서늘한 공기가 지났다. 마주 보고 있는 우리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언젠가 떠나야 하는 사람과 며칠이라도 더 남아있어야 하는 사람. 그것은 알래스카만과 스카겐 그레넨처럼 섞이지 않는 바다이자 세상의 끝이다. 이 세상의 너머에는 저 세상이 있다는 말장난 따위는 어떠한 위로도 되지 못한다.


나는 그녀에게 이제 떠나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자신도 곧 라오스로 가는 티켓을 끊을 것이라 답했다. 무거운 공기에 못 이겨 '인연이라면 언젠가 한 번은 더 만나지 않겠어?' 따위의 맹랑한 몇 마디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 희미한 속삭임은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부서질 뿐이다. 온 세계의 시간이 잠시 멈췄다. 곧 우주의 끝에선 '쨍그랑'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곳과 차가운 곳을 오가던 유리장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소리였다.


수천 개의 유리 조각이 비좁은 골목으로 흩어졌다. 나는 서둘러 달려가서 맨손으로 유리 조각을 하나하나 주웠다. 조금 아팠던 것도 같은데, 매번 그 정도로는 아팠기에 되레 덤덤했다. 몇 번 해가 졌고, 다시 해가 떴다. 땅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은 얼추 다 주워서 배낭 안에 집어넣은 후였다.


그다음에는 몇 달이 지났다. 달력은 어느새 열 장을 넘어가, 다음 해 일월을 달렸다. 그리고 그 깨진 유리 조각을 맞추던 바보 같은 사람은 양손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지구 어딘가를 떠다닌다고 한다.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사람이라면, 더 많이.


여기까지. 한겨울 남쪽 나라에서 다리에 힘이 풀렸던, 어느 맹맹한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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