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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Oct 08. 2020

미적지근한 그 사람은 적당한 사르나트를 좋아했답니다

바람도 천천히 부는 곳, 시간이 멈췄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곳.

도로를 흔들던 경적 소리가 잦아들었다. 얼핏 바라본 창밖에는 자주색 승복을 입은 티베트 승려들과 커다란 불상이 있었다. 뻐근한 허리를 비틀며 택시에서 내렸다. 사르나트에 도착해서 처음 든 생각은 다름 아닌, 공기가 참 깨끗하다였다. 코를 찌르던 매연은 온데간데없었고, 쉬지 않고 타오르는 불기둥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단지 숨을 쉬는 것만으로 기분 좋아지는 아침이었다. 미지근한 공기에 걸음을 맡기고 온몸을 실컷 느즈러뜨렸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거닐던 걸음이 처음 멈춘 곳은 한 네팔 사찰이었다.


내 키보다 서너 배는 큰 대문을 열자, 눈썹이 짙은 구르카족 경비아저씨가 나를 가로막았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들어갈 수 없단다. 알겠다고 말하고 사찰 앞 돌덩이에 걸터앉아 잠깐 졸았다. 설레는 마음에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이다. 잠시 후, 문간을 향해 하염없이 꾸벅거리 나를 경비아저씨가 흔들어 깨웠다. 내 모습이 어지간히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저씨는 멋쩍게 웃으며, "졸 거면 안에 들어가서 졸아. 여기는 가끔 차가 다녀서."라고 말했다. 그러고서는 차가운 망고 주스 한 병을 내게 건넸다. 시작부터 이렇게 따스했다간, 집에 갈 때쯤이면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해도 중천으로 떠올랐다. 예상 못 한 열기에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사람의 온도 때문인지, 태양의 온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찰 내부는 적당히 아름다워서 숨이 턱, 막혔다. 스님들은 잔디밭에 모여 앉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숨이 넘어가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고, 바람이 불 때다 들려오는 풍경 소리는 지나치게 편안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두 손 모아 합장을 하고 스님들 틈에 끼어들었다. 추레한 내 모습을 보고 그들은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를 듣고 나도 까르르 웃었다. 행복을 찾아 떠나온 여행에 목적지가 있다면, 바로 이곳이겠다. 포근한 잔디밭에 퍼질러 누웠다. 어린 스님들은 큰스님 눈치를 슬며시 보더니, 이내 나를 따라 누웠다. 또 한 번, 눈을 감았다가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서 깨어났다.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내 뒤로는 경비아저씨와 스님들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똑같이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단야왓, 단야왓"을 외쳤다.


사찰을 나와서 한참 걸었는데도,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근사한 무언가를 만난 게 아닌데, 정말 별거 없이 따뜻한 사람들과 잠깐 함께했을 뿐인데 나는 행복했다. 이곳을 많이 그리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큰길을 찾아 걸어 내려갔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이리저리 일렁이며 또 한 번 바람에 걸음을 맡겼다.





네팔 사찰에서 시내로 내려가는 길은 사람 사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얼굴 붉히는 사람 없이 모두가 웃고 있었고, 내가 먼저 인사를 하면 곧바로 인사를 받아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건넸다. 문득,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필요도 없이 이곳의 사람처럼 살면 됐는데 말이다. 바람마저 천천히 부는 동네에 나를 녹였다. 매번 급했던 내 마음이, 급하게 가느라 지쳐 있던 내 몸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득 부른 마음과는 다르게, 허기진 배는 '꼬르륵' 요동치다 못해 쓰렸다.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지금 내 위치를 살폈다. 아직 시내까지는 한참이나 남았고, 주변에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화물트럭들의 얄미운 경적 소리를 들으며 끊임없이 이어진 비포장도로를 걸었다. 헤맬 대로 헤매었고, 지칠 대로 지쳤다.


햇빛이 그을린 양쪽 팔로 홧홧하게 끼쳐올 때쯤,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전거 몇 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작은 노점이 있다는 것을 근처에 다 와서 깨달았다. 근사하지는 않더라도 그럴싸한 첫 끼를 먹겠다고 계획했건만, 이미 틀려먹은 듯했다. 나는 힘없이 그 작은 노점으로 들어가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의자에 앉았다. 메뉴는 단출했다. 뭉근하게 끓인 연유를 바른 빵과 짜이. 대충 눈짓으로 빵 한 개와 짜이 한잔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주인아저씨는 간결한 동작으로 바싹 구운 빵에 연유를 바르더니, 높이서 짜이를 따르는 묘기를 보여줬다. 옆에 앉은 아저씨가 박수를 치라며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뻣뻣하게 굳은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멀쩡한 식당보다 허름한 노점이 더 잘 어울린다.


게눈 감추듯 빵과 짜이를 다 먹어 치웠다. 아쉬운 마음에 짜이를 한잔 더 시키고 앉아 있는데, 앞에 앉은 아저씨가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해치우는 내 모습이 재밌으셨던 모양이다. 멋쩍은 모습으로 아저씨한테 "나마스테"하고 인사를 건네니, 크게 웃으시면서 뭐라 하신다. 역시나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아저씨와 몸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누며,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마지막으로 카메라가 픽하고 꺼져버렸다. 실수로 충전하지 않은 배터리를 장전한 것이었다. 가방을 뒤져봐도 여분 배터리는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지 말자고 호들갑을 떤 탓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영문을 모르는 아저씨는 아직도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금방 마음이 누그러졌다. 사진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래도 아저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노점에 미련을 잔뜩 남기고, 사르나트의 하이라이트인 다멕 스투파로 향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크기의 스투파는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한 장소에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커다란 스투파도, 고즈넉한 공원도 아닌, 빼곡히 지나다니는 성지순례자들이었다. 미얀마, 태국, 가끔 보이는 한국과 일본 사람들까지. 다양한 나라에서 온 성지순례자들은 스투파 주변에 모여 불경을 외고, 절을 했다. 나는 스투파와 사람들이 잘 보이는 벤치에 몸을 뉘었다. 적당히 따뜻한 햇볕과 각국의 언어로 들려오는 불경 소리, 집중해야만 들리는 새소리.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분위기가 또 한 번 마음을 덥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곳의 공기를 느꼈다. 이따금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꼈을 때는,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하늘은 조금씩 붉은빛으로 물들고 그늘 아래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 벤치에서 일어났다. 스투파 아래서 오체투지를 하던 스님들도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이제는 사르나트와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다. 밤이 되면 별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틀 밤 정도 머물다 갈까도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가방이 너무 가벼웠다. 큰길로 나가서 릭샤를 찾았다. 땅거미 진 어둠 속에서 릭샤왈라들은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우버를 불렀다. 한 십 분쯤 기다리니, 생각보다 아담한 차 한 대가 도착했다. 차 안은 우버 기사가 틀어놓은 발리우드 음악으로 시끄러웠다. 눈을 감고 노랫소리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렸다. 내가 잠들기 직전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는 영화 데브다스의 배경음악 도라레 도라였다.




내가 경험한 사르나트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적당함이 되겠다.

항상 과한 바라나시와 다르게 사르나트는 적당히 붐볐고, 적당히 조용했으며, 또 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 공기마저 적당한 사르나트를 나처럼 미적지근한 사람이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모든 적당한 것을 볼 때마다 사르나트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짧았던 사르나트 여행은 '사르나트에서 오래 머물기'라는 버킷리스트만을 남긴 채 적당히 빠른 속도로 내 인생에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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