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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Oct 10. 2020

여행 중 우울증

뚝, 뚝, 뚝.

바라나시의 새벽은 쓸쓸으로 모두를 지치게 하곤 한다. 텅 빈 게스트하우스 옥상에 앉아 사람의 온기가 식은 검푸른색 도시를 바라보고 있자면, 온갖 감정과 생각이 겨울밤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 싸늘한 파도가 고요함의 순기능이라면 순기능이겠지만, 홑겹 가면을 쓰고 마냥 즐거운 척 하루를 사는 나에게는 가끔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2018년 겨울, 싸늘했던 새벽에도 나는 옥상에 있었다. 당연히 별은 보이지 않았고, 저 멀리 화장터에서 나오는 빨간 불길만이 도시를 밝혔다. 혼자 있기에, 그래서 외롭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피어오르는 불기둥을 따라 감정이 요동쳤다. 매캐한 공기가 코를 뚫고 들어오자 잠깐 괴로워했고, 쓸쓸한 바람이 살갗을 에고 지나자 바닥으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뚝, 뚝, 뚝. 돌연히 너에게 했던 모진 말들이 떠올랐다. 나는 이만큼이나 아픈데, 너는 어땠을까. 차라리 벌써 나를 잊어버렸어라. 나는 얼마간 안고 살아도 괜찮으니까, 너는 진작에 나를 잊었어라. 바람이 멈췄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렸다. 저건 소의 발소리이리라. 공기가 아리도록 찬 것을 보니, 곧 해가 뜰 모양이다. 무거운 발을 끌고 가트로 나갔다. 아무도 없어야 펑펑 울기라도 할 텐데, 주변에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얼른 눈물을 닦고 모자를 뒤집어썼다. 오들오들 떠는 사이, 골목에서 철수가 나왔다.


철수와 나란히 앉아 새벽 보트를 타러 오는 손님을 기다렸다. 5시가 되어도, 5시 20분이 되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쓸쓸히 일어나서 다시 골목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철수 씨, 혹시 저 혼자서도 보트 탈 수 있을까요?" 그는 안 될 게 뭐가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다시 강가로 내려왔다. 삐걱거리는 작은 보트에 올라탔다. 비릿한 강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철수가 노를 젓자 보트는 뒤뚱거리며 나아갔다. 나는 그에게 오늘은 설명 없이 보트만 타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도 새벽부터 지쳐 있었는지 씩 웃으며 조용히 배를 몰았다. 곧 사방으로 자줏빛 세상이 펼쳐졌다. 몇 시간 전에 옥상에서 봤던 붉은빛이 죽음의 빛이라면, 보트에서 바라본 붉은 빛깔은 삶의 빛이었다. 시간이 만든 온도 차에 심장이 쪼그라들었다가 다시 펴졌다. 사람들이 목욕을 하러 강가로 몰려들었다. 곧 쓸쓸함이 한풀 꺾였다.


혼자 있는 게 워낙 익숙해서, 미지근하게 식은 하루의 끝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서 모른 척했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었던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텅 빈 새벽의 공원을 혼자 걸을 때, 밥은 괜찮은데 커피를 혼자 마실 때, 울기보다는 웃고 싶을 때, 하루가 끝나고 돌려본 카메라에 유난히도 좋은 사진이 많을 때, 적당히 아름다운 노을이 하늘을 물들일 때, 괜스레 헛헛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길을 잃었을 때, 차라리 길을 잃고 싶을 때…. 어떻게 보면 나는 매 순간 몸부림치고 있었던 셈이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보트에는 환하게 웃는 한 쌍이 타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덜 어렸다면, 저 자리에 너와 내가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 하필 둘 다 모터보트가 아니어서 속도가 지나치게 느렸다. 그들의 얼굴이 조금씩 선명해질수록, 나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냥 그 모습을 보는 게 버거웠다. 다시 한 번 어두운 하늘이 드리웠다. 실제로는 발갛고 밝았는데, 느낌이 그랬다. 마음의 무게가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며칠 동안 앓아야 할 수도 있겠다.


보트에서 내려서는 천천히 아씨가트를 향해 걸었다. 매일 걷던 길인데, 매일 보던 호객꾼들인데 그날따라 짜증이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늘을 찾아 앉기만 하면 같이 사진을 찍자고 달려드는 인도 청년들이 미웠다. 어디서 오는 우울과 짜증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해결방법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아무도 없는 가트에 앉아 눈을 감았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호객꾼들이 들러붙었다. 보트를 타라, 엽서를 사라, 피리가 좋다, 좋은 마약이 있다 등등. 어김없이 영업하는 그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서늘한 방으로 돌아왔다. 다른 나라 대도시였더라면,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시간을 때우며 급한 불을 껐을 것이다. 하지만 이놈의 바라나시, 특히 모든 운송수단이 차단되어 걸어 다녀야만 하는 가트에서 이런 위기를 피하기란 쉽지 않다.


겉보기에 더럽고 혼잡한 길 위에서도 나는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한 안정감을 느꼈다. 불완전함 속에서도 안정감을 느끼는 그 모순이 좋았고, 그래서 출국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도 없이 이곳저곳에 짜증을 부리고 나니, 명상이랍시고 가트에서 서너 시간 멍 때린 시간과 사람들과 같이 숨 쉬며 나누었던 호흡이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다. 이렇게 갑작스레 우울감이 찾아올 때면, 몇 달, 몇 년에 걸쳐 쌓아 둔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오늘도 기억에 발이 꽁꽁 묶이고 말았다. 잊으면 그만인데, 아무 일 없던 척 또 다른 하루를 살면 그만인데 그게 쉽지가 않다.


이런 우울과 짜증을 여행 중에 처음 겪었더라면, 나는 당장 한국으로 도망가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다 보니, 이것이 일시적이고 조금 지나면 해결될 것이란 걸 잘 안다. 조금 있으면 지나 일인데도 우울한 아우라를 잔뜩 내뿜으며, 말을 거는 모든 사람에게 짜증스러운 말투로 대꾸하는 나 자신이 싫다. 어쩌면 나는 쓰라린 기억과 별개로 원래부터 우울과 짜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우울과 짜증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여행에서, 숨겨져 있던 원래의 내 모습이 가끔 나타나는 걸지도.


그날 저녁 무렵에는, 나를 못 본 하고 지나가는 소녀에게 디아 한 바구니를 샀다. 그리고 아까는 내가 미안했다고, 내가 원래 그렇게 못난 사람이라 가끔 짜증을 내곤 한다고 말했다. 디아 한 바구니와 성냥 한 갑을 들고 아무도 없는 강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바라나시의 모습이 가트 위에 서서 둘러본 모습보다 더 아름다웠다. 멀리서 보면 무엇이든 희극이 된다. 디아에 불을 붙여서 하나씩 강가로 밀어 넣었다. 하나의 선으로 갠지스강을 떠다니던 디아는 천천한 물살을 만나 이리저리 흩어졌다. 바람에 꺼질 듯 일렁이는 촛불에 기억, 아니 미련을 실은 것이다. 하지만 어두운 강물 위에서 희미한 불빛을 내던 디아는 마지막 빛을 토해내고 금방 물아래로 가라앉았다. 어느새 차가워진 바람이 또 한 번 살갗을 베고 지났다. 그리고 검붉은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뚝, 뚝,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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