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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Oct 14. 2020

되돌아보면, 나는 너무 빨리 가고 있지 않았나

느리게 사는 것이 다만 느리게 가는 것은 아니다.

수도꼭지가 열린 듯, 마음 한편에 감춰뒀던 감정들이 뿜어져 나오는 날이 있다. 바라나시에서 처음으로 비를 맞았던 날이 그랬다. 습기로 무거워진 공기 때문이었을까, 전날에는 반 정도 남아있던 감정이 그날 아침에는 바닥을 보였다. 나는 물에 젖은 종이 인형처럼 그지없이 축 처져서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해야 하는 일이 있었어도 아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밥을 먹으러 나가기가 조금 뭐해서 선반을 뒤적였다. 죄 말라비틀어진 빵가루와 포장지뿐이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없었다.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주변에 있는 식당들을 훑었다. 커리를 먹기에는 벅찼고, 짜이 한잔으로 대충 때우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비가 오는 날 마땅히 먹어야 하는 음식에 대해 생각했다. 파전이나 칼국수 같은 바라나시에서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음식들, 그리고 돌연히 바나나가 떠올랐다. 바나나가 먹고 싶었다기보다는, 바나나를 사러 시장에 가고 싶었던 것 같다.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에 시장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테니.


모자를 대충 뒤집어쓰고 시장으로 향했다. 지붕을 타고 떨어지는 묵직한 물방울이 온몸을 적셨다. 조금 빨리 걸었으면 좋겠건만, 길을 가로막은 할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미 다 젖은 몸, 비를 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세월아 네월아 걸었다. 골목이 잠깐 넓어진 틈을 타서 할아버지를 추월했다. 하지만 그 앞에는 리어카를 끌고 가는 야채장수가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골목을 돌아 돌아 야채장수를 따라잡았다. 아득히 먼 골목의 끝이 보였다. 이렇게 뻥 뚫린 골목을 걷는 건 처음이었다.


부지런히 골목을 달렸다. 샛길에서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몰라서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50m쯤 달렸을 때, 다시 한 번 걸음이 느려졌다. 처마 아래서 비를 피하던 소가 갑자기 일어난 탓이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한 달 전만 해도 소를 떠밀며 앞으로 나아갔을 텐데, 얼마 전 어느 일본인 여행자가 소뿔에 복부가 관통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소 앞에만 서면 나도 모르게 멈칫하게 된다. 하는 수 없이 소를 따라 걸었다. 소가 꼬리를 쳐들면 잠깐 피했고, 소가 멈추면 같이 멈췄다.


얼마간 걷다 보니, 옷가지를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비를 맞다 보니, 시장이 코앞에 있었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래도 머리가 '펑'하고 터지기 전에 도착한 건 다행인 일이다. 끈적한 진흙(이거나 똥)을 밟으며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삶은 달걀을 파는 아줌마가 보였고, 꽃을 파는 할머니는 비를 가리느라 바빴고, 저 끝에 과일을 파는 아저씨의 노점이 있었다. 나는 성큼성큼 아저씨에게로 다가갔다. 걸으면서 살펴본 노점에는 바나나도, 멜론도, 오렌지도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나나 한 다발을 품에 안고, 빗방울을 피할만한 곳을 찾았다. 시장 입구에 놓인 파라솔 하나가 보여서 그쪽으로 들어갔다. 파라솔 안에는 핼쑥한 아이들 서너 명이 앉아 있었다. 바나나에 묻은 물기를 잘 닦고, 반을 꺾어서 아이들에게 건넸다. 아이들은 환하게 웃더니 바나나를 껴안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 채로 바나나 껍질을 벗기고,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바나나가 굳이 궂은 날 생고생을 해가며 먹을만한 음식인가에 대한 의문은 들었지만, 그런대로 맛이 있어서 마음이 풀어졌다. 선 자리에서 바나나 서너 개를 까먹고 나머지는 소들 앞에 집어 던졌다.


바지춤을 추스르며 요연히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던 도중,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낸 모 사진작가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분명 오늘 아씨가트에 있는 피자집에서 나를 만나기로 했단다. 내 기억보다 그의 기억이 분명 더 정확할 것이라 금방 가겠노라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람과 동물이 가득 들어찬 골목길을 바라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빨리 걸어간다고 해도 아씨가트까지는 30분이 넘게 걸릴 것이다.


골목에 발을 디뎠다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곧장 릭샤에 올라탔다. 부지런히 나아가던 릭샤는 큰길에 들어서자 완전히 멈춰버렸다. 널따란 도로 역시 골목과 상황이 별다르지 않은 듯했다. 거기에 릭샤왈라는 길가에 아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멈춰 서서 꼭 몇 마디씩 대화를 나눴고, 심지어는 갓길에 릭샤를 세우고 오줌을 싸기도 했다. 그가 허리띠를 푸는 장면에서 잠깐 웃었지만, 그다음부터는 정색으로 일관했다.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빨랐을 것이란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


팔자 좋은 릭샤왈라의 콧노래를 들으며 쉴 새 없이 다리를 떨었다. 그런다고 더 빨리 가는 게 아닌데, 내 속만 더 타들어 갈 뿐인데 그러지라도 않으면 숨이 막혀서 죽을 것만 같았다. 목적지께에 와서는 완전히 멈추지도 않은 릭샤에서 뛰어내렸다. 그 덜컹거리는 세 발 오토바이 위에 조금만 더 머물렀다면, 나는 조붓한 릭샤 위에서 심장이 터진 채로 죽었을 것이라고 감히 예상해본다. 릭샤에서 내려서 약속 장소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아까 있었던 일들의 반복. 나는 3km 남짓의 거리를 한 시간 반이 넘게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분명 점심 약속이었는데, 피자집에서 나왔을 때의 시간은 오후 다섯 시였다. 가트에 나와 축축이 젖은 옷을 말렸다. 그날따라 강물이 흐르는 속도도 지나치게 느린 것 같아서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온갖 곳에 다 짜증을 부리고 있으니,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비벡이었다. 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즐겨가던 찻집을 찾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찻집 근처에 다다르자 생강차가 내뿜는 훈김이 피부로 끼쳤다.


자그마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비벡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는 중에는 그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킴, 너는 성격이 너무 급한 것 같아. 차도 빨리 마시고, 밥도 빨리 먹고, 심지어는 걷는 것도 빠르다니까. 내가 그렇게 급해지는 순간은 두 가지밖에 없어. 화장실이 급할 때, 내 딸이 다쳤을 때."

그의 말에 빠르게 돌아가던 생각이 잠시 멎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도 나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뭐 하나 틀린 이야기가 있어야 따지기라도 하지 않겠는가. 내가 멍하니 찻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좋은데, 너무 그러지는 말라고. 걱정돼서 그래. 느리게 사는 게 꼭 느리게 가는 것만은 아니야."


아침부터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매 순간 '빨리빨리'를 울부짖었던 내 꼴이 한심스럽게 느껴져서였다. 굳이 달려갈 필요도 없었고, 잠깐 멈췄다 간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밤늦게까지 굳게 입을 닫았다. 이번에는 민망해서 말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잊어버린 나만의 속도를 찾는 중이어서 그랬다.


다음 날 아침에도 비벡이 한 말이 귓가를 빙빙 맴돌았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이따금 퍼졌던 것도 너무 빨리 가느라 에너지를 다 썼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온종일 조금 아팠다. 여태 빠르게 달려온 내 몸뚱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짧은 시간에도, 수십 번씩 다리를 떨게 했던 나는 얼마나 모진 주인이었나.


반나절 동안 퍼질러져 있다가 느지막이 일어나서 골목을 걸었다. 느리면 느린 대로, 빠르면 빠른 대로 앞서가는 사람의 뒤통수를 쫓았다. 식당에 가서도 절대 재촉을 하거나 다리를 떨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을 아끼는 법을 몰라 우왕좌왕 헤맸던 나에게 잠깐 쉬어갈 틈을 준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저녁이었다. 느리게만 갔던 하루의 끝이 이렇게 빨리 찾아오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서는, 천천했던 하루를 이리저리 뒤적였다. 앞서가던 할아버지의 이름과 식당에서 만났던 어느 여행자의 취향, 비벡의 딸이 둘이었다는 사실까지. 빠르게 가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늘 있었던 일을 그리운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내 방은 인터넷에 잘 터지지 않아서 그전에도 필요할 때면 종종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가트로 나가 했다. 옥상에 올라가서 우연히 바닥을 내려다봤는데, 낯익은 골목길이 기우는 햇빛을 맞아 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평소에는 뚫어지게 휴대전화만 바라보느라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새로 찾은 감동에 심장이 말랑하게 풀어졌다.


스피커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속도를 드디어 찾은 것 같다고, 느리게 사는 것이 다만 느리게 가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한껏 목소리를 높이며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그런 목소리 역시 한동안 듣지 못했던 것이라 훈훈한 열기가 이마를 달궜다. 여러모로 천천했던 그날은, 어지간히 따뜻했던 날로 남았다.


먼발치 찻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훈김이 옥상까지 다다랐다. 이제부터 생강차 냄새는 천천한 냄새고, 내가 좋아하는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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