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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Oct 19. 2020

빙 돌아가도 좋으니, 너무 늦기 전까지만 다 와라

나는 지금 골목의 끝에 다 와 있다고 생각하련다.

땅콩장수가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그것은 '30분 후면 해가 집니다"와 같은 이야기다. 바닥에 넣어놓은 짐들을 다시 배낭에 집어넣었다. 서늘한 공기가 머리에 맺힌 땀을 말렸다. 북인도의 한겨울 저녁은 생각보다 쌀쌀한 편이다. 얇은 겉옷을 꺼내 입고 좁다란 골목을 걸었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숙소에 도착하려면 쉬지 않고 계속 걸어야 한다.


골목 귀퉁이에 칼을 가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자전거에 다시 바퀴를 다는 걸 보면 곧 장사를 마무리할 모양이다. 캐시미어 숄을 파는 가게도 일찌감치 셔터를 내렸다. 불안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희뿌연 하늘의 절반이 노을에 잡아먹혔다. 잠깐 둔통이 일었다가 바로 사라졌다. 서둘러 걷는 사두에게 가트로 가는 길을 물었지만, 그는 모른  갈 길을 갔다. 저렇게 매정한 이를 스승으로 뒀다간, 나 역시 바싹 마른 사람이 되리라. 유감하고도 또 유감한 일이었다.


골목 너머로 까만 연기가 보여서 달려갔으나, 그곳은 화장터가 아닌 쓰레기 소각장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불을 크게 붙여 놓고 자리를 떠난 사람은 심장이 큰 사람일까, 아니면 자신이 붙인 불에 잡아먹힌 미지근한 사람일까. 휴대전화도 없이 늦은 시각 골목 여행을 떠난 나는 분명 후자다. 쉬지 않고 걸었지만 왜인지 미진한 느낌이 들어서 속도를 올렸다. 땀이 등판을 흠씬 적셨고, 속은 메스껍다 못해 부글부글 끓었다.


곧 완전한 어둠이었다. 흔한 소설이나 시에서처럼 달빛과 별빛에 의지해서 걸을 수도 없었다. 하늘은 반타블랙 페인트가 칠해진 것처럼 모든 빛을 흡수했고, 그 두께가 얼마나 두꺼운지 빛 한 점 새어 나오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았을 때와 떴을 때 펼쳐지는 풍경이 같았. 어느 정도 시간이 흐후에는 지금 내가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가만히 서서 촉감으로 배낭을 뒤졌다. 만져지는 것은 노트와 책과 팬 몇 개뿐, 손전등 따위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이번에는 주머니를 샅샅이 뒤졌다. 지폐 몇 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바닥에 엎드려 그것을 찾을 겨를은 없었다. 뒷주머니에는 묵직한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라이터였다.


라이터 불에 의지해서 좁은 골목을 걸었다. 불을 잠깐 비췄다가 열 발자국을 걷고, 또 한 번 불을 비췄다가 열 발자국을 걸었다. 하지만 곧 가스는 바닥을 보였고, 뜨겁게 달구어진 철판은 플라스틱을 녹여 기분 나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차라리 라이터는 나중을 위해 아껴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자 달궈진 쇠판이 허벅지를 지졌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불빛이 사라진 세상을 아까보다 훨씬 더 무거운 어둠이 채웠다.


시각을 잃은 이상 나머지 감각에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신발에 끌리는 모래의 촉감에 집중했고 귓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종류의 소음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시각으로만 세상을 살아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나에게 나머지 감각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적 일기장에 눈이 머는 것이 온 지구에서 가장 무섭다고 적었던 일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지금 공포에 질려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방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주저앉았다. 지금처럼 긴장된 상태로 계속 길을 찾느니, 차라리 해가 뜰 때까지 기리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적어도 그편이 속은 더 편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니 내려다봤을 수도 있겠다. 중력이 사라진 듯 하늘을 떠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너무나 몽롱해서 카페 직원이 커피에 약을 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차올랐다.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서, 이대로 사라져 버리는 삶의 끝을 그려봤다. 아무 곳에도 소용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 불길에, 또 어둠에 잡아먹히는 마무리는 꽤 과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죽음의 방식에 관해 고민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아무리 애써도 영 답이 나오지 않아서 고민을 접었는데, 지금은 알 것도 같다. '인도를 여행하던 김 모 씨. 복에 겨운 상태로 골목에서 죽다. 그 골목은 그가 살던, 나아가 좋아하던 골목이라고 한다.' 얼마나 완벽한 끝인가. 사라질 수만 있다면 이대로 사라지는 것도 퍽 아름답겠다.


개운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는데, 바닥에서 허공으로 얼굴이 떠올랐다. 두 해 전, 체코에서 만났던 아무개였다. 그녀는 지금 무얼 하며 지낼까? 여행이 끝나면 발리에 작은 카페를 차리겠다 했는데, 그 카페는 오픈을 했을까? 그곳의 커피 맛은 어떨까? 파리했던 그녀는 결국에 생기를 찾았을까? 참, 내가 발리를 다녀온 적이 있었나? 발리에 사는 사람과 발리에 살았던 사람, 그리고 나중에 발리에서 살 사람을 아는데, 나는 발리에 다녀온 적이 없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내년 7월에는 꼭 발리에 가야겠다. 발리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똑같이 더우니 여름에 가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차라리 건조한 7월이 발리를 여행하기에 딱 알맞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나서 골목을 걸었다. 한쪽 벽을 손으로 짚어가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갠지스강과 정반대 방향이더라도 괜찮다. 어쨌거나 아무 끝으로나 나가서 릭샤를 잡아타면 될 테니. 벽을 짚은 손바닥이 얼얼했다. 조금 까졌을 수도, 아니면 흥건하게 피가 났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발리에 가야 하고, 무엇보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그깟 핏방울쯤이야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얼마간 걸었을 때, 다시 허공으로 옅은 빛이 일렁였다. 이번에는 진짜 빛이었다. 눈을 찡그리며 광원을 노려봤다. 투박한 휴대전화와 그 불빛에 비친 라훌의 얼굴이 보였다. 정말 꼴 보기 싫던, 방(Bhang)에 취한 그의 얼굴이 어찌나 반갑던지, 손을 흔들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정신 못 차리는 그가 대견스러운 건 처음이었다. 휘청거리는 그의 걸음을 따라 가트로 나갔다. 휘청거리는 가로등이 갠지스강을 환하게 밝혔다.


가트를 가로질러 곧장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갔다. 서둘러 자물쇠를 열고, 쿵쿵 뛰던 심장을 쉬게 하려 침대에 몸을 뉘었다. 헤매지 않았던 날은 없었지만, 오늘은 유난히도 헤맸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라, 평생 헤매지 않았던 날은 없었지만, 요즘은 유난히도 헤맸다. 아니, 아직 헤매는 중일 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뜩 내가 지금 골목 한가운데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골목에서 빠져나왔는데,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얇실한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길을 잃은 골목은 바라나시에 좁디좁은 그런 골목뿐 아니라, 여태까지 정해놓은 목표, 그곳이 큰길이라 한다면 그 큰길을 찾아가는 길에 마주한 그런 골목이라는 것. 내가 아직도 골목 한가운데서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속이 부글거렸다. 지긋지긋한 골목에서 언제쯤 빠져나올 수 있을까. 가만히 눈을 감고 숫자를 세다가, 그녀가 다시 떠올라서 휴대전화를 쥐었다. 따분한 인사말은 다 떼 버리고, '발리 날씨는 어때?'쯤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게 가장 낫겠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피딱지가 앉은 손을 닦고 있는데, 진동소리가 들렸다. 분명 그녀의 답장일 것이다. 아직 확인도 하기 전이지만, 곧장 기분이 좋아졌다. 희망이 생겼달까. 지금은 비록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지만, 한쪽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걷다 보면 큰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희망. 그리고 그 길은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서 그리 멀지만은 않을 것이란 희망. 마지막으로 어둡고 컴컴한 그 길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을 것이란 생각만 해도 벅찬 희망.




나는 지금 골목의 끝에 다 와 있다고 생각하련다.


해가 질까 심장이 쿵쿵 뛰고,

너무 오래 걸어서 다리는 퉁퉁 부었지만,

결국에는 낯익은 그런 큰길에 도착할 것이고,

그것은 결코 머지않았다고,

그 길에는 네가 있으니 조금만 더 힘내라고.


앞으로도 오늘만 같아라. 빙 돌아가도 좋으니, 너무 늦기 전까지만 다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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