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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Oct 20. 2020

나 오늘 떠나요

이 정도면 적당히 잘 되었다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뜨기도 몇 시간째,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모스크에서 기도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아직 5시도 채 안 됐을 것이다. 몇 달째 정리가 안 된 배낭을 뒤적이다 허름한 겉옷 두어 개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개들마저 잠든 이 야심한 밤, 주변에 보이는 건 소똥뿐이다. 나는 이렇게 많은 똥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생각하며 간신히 똥을 피해 가트로 향했다.


주황색 가로등이 호젓한 가트를 밝혔다. 입안이 몹시 맵고 쓴 것은 유난히도 무거운 공기의 탓이고, 쉬지 않고 타오르는 화장터 홍염의 탓이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부음이 사라진 삶을 이제는 상상하기 어렵다. 괜히 쓸쓸한 마음이 들어서 바닥에 널브러진 깡통을 걷어찼다. 텅 빈 쇳덩이 울리는 소리가 서너 번 메아리쳤다. 차가운 돌계단에 앉아 갠지스강을 바라봤다. 밤안개 잔뜩 낀 희끄무레한 강가를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화끈거리는 눈시울을 닦으며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었다. 담배 연기가 이리저리 요동치다가 더 큰 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으니, 하늘이 점점 붉어졌다. 뒤편에서 터벅터벅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보나 마나 철수 씨일 것이다. 힘없이 푹 꺼진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3, 2, 1. 손을 들고 정확히 삼 초면 그가 능청스러운 말투로 내게 인사를 건넨다.

.

"일찍 일어났네요? 맨날 늦게 나오더니."

"오늘이 떠나는 날이라서요. 마음이 어수선해서 잠이 잘 안 오네요."

"아…, 정말요? 이제 정들었는데…. 또 올 거죠?"

"그렇겠죠. 아마도. 근데 나중에 다시 찾아왔을 때, 철수 씨가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십 년 전에 다녀간 사람들 얼굴도 다 기억이 나요. 언제라도 다시 오면 금방 알아볼 거예요."

"바라나시에 와서 처음 이야기한 인도 사람도 철수였는데, 마지막도 철수 씨랑 함께하네요. 인연인가 봐요."

"진짜 그렇네요. 영광입니다."

.

첫 작별인사를 하고 나니,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실감 났다. 이제 바라나시에서 남은 일이라고는 모든 것에 고하는 작별인사밖에 없다.


가트는 아침부터 목욕을 하려는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찼다. 다시 삶의 기운이 일렁였다. 나는 습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골목 안에 있는 낸디 찻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서늘한 골목길을 걸으며 생각해보니, 매일 두 번은 갔던 이 찻집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씁쓸한 표정으로 항상 마시던 레몬티 한 잔을 시켰다. 이번에는 찻집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다. 찻집에 처음 발을 디뎠던 그 날처럼,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떠나야 한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달곰한 차 한 잔을 바닥까지 털어 마시고, 아무 일 없는 척 평소와 같이 가게를 나왔다. 켜켜이 먼지가 쌓인 선반을 만지작거리던 주인 아저씨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익숙한 그 웃음이 여러 조각으로 흩어져, 살갗에 내려와 앉았다. 여독이 모두 사라진 다음에도 그것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가게를 나와서는 골목길을 계속 걸었다. 모나리자 카페를 지날 때는 할아버지에게 눈인사했고, 라주 아저씨네 가게에서는 과자 한 봉을 샀다. 과자를 먹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그냥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 익숙한 슈퍼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애쓰며 바라나시와 이별하는 동안,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김동률의 '출발'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사의 내용과 지금의 상황이 아주 딱 맞아떨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출발이란 항상 이별은 수반하는 법이니까.


이제 세 시간 후면 정든 이 골목길을 떠난다. 한없이 무거워진 발을 질질 끌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갔다. 가장 큰 작별인사가 남았기 때문이다. 딱딱한 소파에 앉아 형 누나들이 나오길 기다렸다. 이미 두어 번씩 읽은 책장 속 책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조우 누나가 먼저 나왔다.

.

"벌써 일어났네. 너 가고 나면 이제 우리 심심해서 어떡해?"

"나중에 또 보면 되죠! 아 맞다. 잠시만요. 드릴 게 있는데, 손 좀 주세요."

"어 유심칩이네! 없어도 괜찮겠어?"

"네. 괜찮을 것 같아요. 이제 여행은 다 끝났으니까요."

.


누나에게 유심칩을 건네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서 배낭을 쌌다. 배낭을 싸면서 둘러본 방에는 내 흔적이 참 많이도 묻어있었다. 시장에서 200루피 주고 산 황동 컵부터, 새 들어오는 불빛을 막으려 문틈에 붙여 놓은 신문지, 잠깐 스쳤던 사람이 남겨두고 간 침낭, 어제 먹다 남은 오렌지까지.

떠나는 순간, 후련함보다 미련이 더 크게 남으면 그 여행은 성공한 여행이라고, 태국에서 만난 누군가가 말했다. 방을 정리하면서, 별 의미 없는 모든 물건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던 까닭은 미련이었다. 그렇다면 바라나시 여행은 더 좋을 수 없는데 이토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도 미련일까.


배낭을 다 싸고 나서는 방에 남은 내 흔적을 남김없이 치웠다. 바닥을 쓸고, 거울을 닦고, 마지막으로는 문틈에 꽂아 놓은 향을 뽑았다. 묵직한 향 연기가 사라진 방 안을 더 무거운 공기가 채웠다. 내가 오랫동안 머문 이 공간이 이제는 추억 속에만 남게 된다는 사실이 적잖게 가슴을 후벼 팠다. 아, 잊지 않고 아직 먹지 못한 과일과 가장 좋아하는 시집도 잘 정리해서 침대맡에 올려두었다. 딱 그 정도가 해묵은 여행자가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낭만이다.


청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형 누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게스트하우스 문 앞에 서서 다 같이 사진을 찍고 1층에 있는 카페로 내려갔다. 매번 먹던 음식을 시키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원인 모를 찝찝함이 몰려왔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노트를 뒤적였다. 그리고 노트 맨 앞장에 적혀있는 몇 글자, '선재네 짜이집 50루피'. 미처 갚지 못한 외상값이 있었던 것이다.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뒤로하고 가트로 달려갔다. 이제 정말 떠나야 해서 시간이 없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가트에는 다행히 선재 동생이 있었다. 대충 인사를 하고 가방에 남은 동전을 모두 털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외상값보다 훨씬 많은 금액에 놀라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괜찮다고, 오늘 바라나시 아니, 어쩌면 인도를 떠날 수도 있어서 더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다시 골목으로 달려가는 내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숨소리가 더 커서 그가 뭐라 말했는지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나중에 또 보자고 말했던 것 같다.


다시 카페로 돌아오니, 누나가 미리 우버를 불러놨다고 말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택시를 불러준 것뿐 아니라 모든 게 다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견뎌내기에는 이별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웠던 모양이다. 숨소리마저 익숙해진 사람들과 비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골목이 조금만 더 넓었어도 많이 섭섭할 뻔했는데, 적당히 좁아서 그들의 온기가 내 심장께까지 끼쳤다. 저 멀리 골목 끝에 우버 기사가 보였다. 애타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사람이, 오늘은 부지런히도 왔다.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가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택시에 올라탔다. 우버 기사는 문이 닫히자마자 가속페달을 밟았다. 힘없이 축 처진 몸이 뒤로 쏠렸다. 처음 지나온 길을 되돌아 달리는 기분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쉼 없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 마주했던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생각하면 조금 앓게 되는 사람도 있었는데, 대부분 웃음으로 지났다.




사실, 진짜 바라나시는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곳과는 조금 달랐다. 갠지스강은 더러웠고, 임수정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며, 내 인생의 결정적인 터닝포인트를 만들어줄 만한 스승님 또한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바라나시가 다른 무엇이 아닌 그저 바라나시로 남았기 때문이다.

갠지스강은 더러웠지만 고즈넉해서 생각하기에 지구 상에서 가장 좋은 장소로 남았고, 임수정은 없었지만 영화와 견줄만한 사랑을 했고, 스승님 또한 찾지 못했지만 그런 꿈같은 스승님은 애초부터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면 적당히 잘 되었다. 인도는, 바라나시는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었다.


누군가 내게 바라나시가 어땠느냐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답할지도 모르겠다.

바라나시? 거기 더러워. 조금 위험한 것 같기도 하고.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곳이지. 그런데 괜찮았어. 이유는 몰라. 그냥 바라나시여서 그랬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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