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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Oct 19. 2020

당신의 영혼을 빌려 갑니다

'찰칵' 소리와 함께 당신의 영혼을 잠시 빌려 가겠습니다.

인물 사진을 본 사람들은 간혹 이렇게 말하곤 한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찍히는 사람의 영혼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은 후에는 오랫동안 불편함에 시달렸다. 찍어둔 사진을 보다가 흠칫 놀라서 컴퓨터를 끈 적도 있었고, 왜인지 셔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더뎌져서 사진을 망친 날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차오르는 찝찝함을 애써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함께 나눈 이의 사진을 찍지 않으면 피가 거꾸로 솟는 병에 걸렸기도 했고, 한때는 누군가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담는 것이 직업이었던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아씨가트 근처에서 하루를 시작하던 날도 그랬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뷰파인더에 비친 마지막 잔상이 하늘을 떠다녔다. 사진을 찍자면 셔터를 누르는 시간이 평소보다 길어졌고, 사진을 찍는 자세도 점점 어색해졌다. 그저 습관처럼 반나절 동안 사진을 찍어내긴 했지만, 당연히 마음에 드는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돈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면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찝찝이 머리 깊숙이 자리 잡은 다음, 오롯이 내 의지로 사람들의 모습을 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트랩으로 카메라를 둘둘 말아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찍어야 하는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방법이 없는걸.


그렇게 사진 찍기를 아예 포기한 지 한 열흘쯤 지났을 무렵, 시내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익명의 사진작가 한 분을 만났다. 그분과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포트레이트 사진을 좋아하는 것도 그랬고, 류시화 시인의 책을 즐겨 읽는 것도 그랬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포트레이트 사진과 류시화 시인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인도에서 만난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궁합이 잘 맞았던 우리는 빤데이 가트 위 선재네 짜이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먼저 그분께 물었다. "요즘 누군가의 얼굴을 담는 게 정말 망설여져요. 코와 코가 맞닿기 직전에 서서 아무 일 없는 듯이 그 사람의 얼굴을 담자면, 내가 그들의 영혼을 빼앗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왜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사람의 사진을 찍는 것은 영혼을 빼앗는 행위와 같다… 뭐 그런 미신 같은 이야기요." 그분은 곰곰이 생각하 힘겹게 입을 뗐다. "그것도 맞는 이야기 같기는 한데, 반대로 사진으로 사람의 영혼을 조각하는 유섭 카쉬(Yousuf Karsh) 같은 분들도 계시잖아요."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사진 잘 찍으시잖아요. 무엇보다 좋아하고.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냥 영혼을 잠시 빌려서 그 사람들을 다시 조각한다고 치세요. 더 좋게, 더 아름답게요."


원했던 대답을 들은 건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다. 하긴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렸으니 마음을 고쳐먹으면 안 될 것도 없다. 곧장 골목으로 들어가 매일 담고 싶었던 담뱃가게 아저씨의 얼굴을 담았다. 힐끔 쳐다본 사진은 멀쩡히 잘 찍혀있었다. 또 한 번 불편함이 일렁였다. 이번에는 너무 멀쩡한 것이 탈이었다. 환하게 웃는 아저씨의 얼굴을 두어 장 더 찍었다. 아저씨의 얼굴이 오래전 본 그림처럼 너무 또렷하고 낯익었다. 사진이 생기를 잃은 것이다. 카메라를 끄고 어두침침한 계단에 앉았다. 다시는 사진을 찍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동으로 만든 묵직한 카메라와 렌즈들이 어깨를 짓눌렀다. 입안에 쓴맛이 맴돌았다. 다시 담뱃가게로 들어가서 파이프 한 자루와 독한 잎담배 한 봉지를 샀다. 쓴맛은 더 쓴맛으로만 덮을 수 있다.


숙소로 돌아가서 내가 좋아하는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몇몇은 내가 찍은 사진이고, 남은 몇몇은 이름 모를 누군가가 찍은 사진이다. 그리고 그 천 장이 넘는 사진들의 공통점을 찾았다. 그것들에는 표정이 있었고, 표정이 없는 사진에는 감정이 있었다. 한동안 내가 생생한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끼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저 해치우듯, 찍어내기만 했으니까. 죄책감이 밀려와서 그달 찍은 사진을 몽땅 지웠다. 그 사진은 내가 아닌, 몸에 익은 내 습관이 찍은 것이어서 삭제하는 게 맞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동안 만난 모든 이들의 영혼이 내 주변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그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고,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겠지만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창문 밖으로 카메라를 던져버릴까,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말았다. 카메라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카메라를 손에 쥘 때마다 찝찝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와 같이 세상을 살았고, 사람들을 만났다. 담고 싶은 열망이 차오를 때는, 그것을 먼저 눈으로, 마음으로 담으려 애썼다. 사진이 사라진 삶은 감정이 겪는 배곯음 같은 것이어서 가슴께가 어지간히 헛헛했다.


며칠이 지나고 쓸쓸히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을 때, 다시 한 번 그 작가님을 만났다. 솔직하게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니, 일단 자기 사진을 찍어보라고 하셨다. 그의 녹슨 필름 카메라를 들고 천천히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를 들고 멍하니 서 있는 내 모습을 본 그가 물었다. "지난번과 무언가 조금 다르지 않아요?" 나는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가 또 한 번 물었다. "그동안 바라나시에서 가장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누구예요?"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답했다. "게스트하우스에 계시는 분들도 친하게 지냈고, 모나리자 할아버지도 친했고, 저번 주 가트에서 만난 비벡과도 친하게 지냈어요." 작가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요. 그러면 그분들의 사진을 먼저 찍어봐요. 진심으로"


헛헛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가트에 앉아 시간을 썩혔다. 낯빛이 어두운 내 모습을 보고 비벡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나는 아까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라서, 계단을 뛰어 올라가 잠시 접어둔 카메라 가방을 들고 왔다. 그리고 말없이 비벡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던 그도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참 더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와 둘러앉아서 방금 찍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사진에서 강변에 흩어진 해감 냄새가 났고, 천천히 웃음을 보이는 비벡의 얼굴이 보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신이 나서, 곧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말하고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천천히 걸어도 됐는데, 발걸음이 가붓해서 자꾸만 보폭이 넓어졌다.




그날 밤, 나는 때 묻은 노트를 펴고 그 위에 이렇게 적었다.

'진심으로 사람을 느끼기.

사진은 그렇게 느낀 사람을 담아내는 수단으로만 사용하기.

그들의 영혼을 아주 잠깐만 빌리기.

영혼을 예쁘게 잘 조각하기.

조각한 사진을 오랫동안 잊지 않기.

.

※어쨌거나 사람보다는 사진이 우선일 것.'


한낱 사람의 사진이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카메라를 쥘 때마다 멈칫했던 건, 오래된 미신 때문은 아니었다. 사람을 먼저 사람으로 느낄 것. 그리고 그들을 사진으로 담아 오랫동안 품을 것. 사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잠깐 잊어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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