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숙제, 대학, 토익, 스펙, 취업, 적금. 엄마는 남들 사는 대로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했다. 야자를 땡땡이쳐본 기억도 없다. 월드컵 때 다른 애들과 같이 운동장에 나가 와~ 했던 게 가장 큰 일탈이었다. 엄청나게 신나지도, 불행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았지만 이게 행복인가 싶었다.
회사에 들어오니 나와 비슷한 궤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모여 같은 일을 했다.회사에서의 하루하루가 수월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유사한 모습의 사람들이 함께 한다는 건 어떤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지금 잘 사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잘 못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새벽 알람소리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걸 13년이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느낌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기한 건 나는 분명 매일 밖으로 나갔는데, 내 삶은 건물 안에 머물러 있었나 보다.세상은 아주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나는 따뜻한 안도감의 물속에 담겨 있었다.
12.5도만으로는 숙면하기 어려울 것 같은 날. 포트와인로 사갈까? 편의점 문 앞을 나선 지 1분도 안되어 다시 발길을 돌렸다.
혹시 포트 있나요?
아! 있긴 한데.. 이게 전부예요.
손님이 거의 안 찾는 구색인지 진열장 구석에 단 3병의 포트와인이 겹쳐 진열되어 있었다. 폰세카와 포르투발.둘 다 19.5도의 높은 도수와 달콤하고 진한 맛을 자랑하는 포트와인의 대표 와인이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오늘은 포티 토니 포트가 필요한 날인데.. 그날 몇 병 더 사다 놓을 걸 후회가 된다.
본사에서 발주가능한 포트전부 넣은 거에요. 포트 와인 찾는 분은 처음이네요.
이 가게에 다닌 지 수년 만에 주인의 목소리를 가장 길게 들었다. 마치 아무도 묻지 않던 전시장 구석에 출품한 자신의 작품에 대해 물은것처럼, 주인은 약간 신이 나 대답을 했다. 그러다 스스로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금새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
폰세카는..별로죠?
말의 의미를 아는 두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포트는 와인샵으로 가세요.지금은 문 연 곳이 없을 것 같아요.그러게요. 포르투발 도우로 토니포트를 하나 더 사서 가게를 나왔다.
앙시앙땅은 셀러에 넣어두고 포트를 식탁에 올려두었다. 마개를 따자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하면서도 진한 향. 서랍장을 뒤적거려 먹다 남은 볼 초콜릿과 아몬드를 그릇에 내왔다. 핸드폰을 거치대에 올려놓고 인도 택시 기사와 실갱이하는 유튜버의 한 장면을 틀어 둔다. 보고 또 봐도 재밌는 세계 방랑기.
며칠 째 한 장도 펼쳐보지 않은 죄스러운 마음에 책 한 권을 꺼냈다. 회사 때려치우고 수년간 해외여행을 떠난 누군가의 이야기이다. 결국 이 사람은 돌아왔을까, 지금은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먹고살까?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 작가의 프로필을 보았다. 재취업이 수월한 직무로 보인다. 그럼 그렇지. 책 장사꾼의 인생포르노는 옆에 치워두고 한 모금 마셨다.
한 모금, 두 모금. 19.5도의 포트와인이 목을 타고 흐른다. 엄마는 내가 평범한 사람이 되길바랐다. 그녀의 바람대로라면 난 꿈을 이룬 사람인데?레드의 취기로는 이겨내기 어려운 공허함은 진한 포트로하나씩 채워간다.
행복의 정의, 나의 쓸모. 인간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늘 갈망하는 존재인가? 사춘기보다 무서운 사십춘기가 오나 보다.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사장이 10명인 와인샵 창업 이야기. 부제가 눈길을 끈다.
그날 진급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처음 계획대로 앙시앙땅을 마셨다면,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초콜릿 사이로 스며드는 포트의 진한 달콤함 끝에 주인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그러게요.. 근처에 와인샵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