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인미장원 Feb 04. 2024

한남

어차피 마실 거

한남동 끝자락 주택가. 멀리서 가게 네온사인이 보인다. 마감하지 않은 투박한 벽면에서 빛나는 로고. 가까워질수록 북적이는 음악소리.


인테리어라고 할 것도 다. 철거한 그대로 노출된 벽과 배관, 공사장에서 볼법한 쇠로 만든 진열장. 네온사인과 화려한 음악과 조명으로 미완성인 듯한 가게의 단점을 잘 보완했다. 진열대 위에 규칙 없이 놓인 맥주들. 저게 팔릴까 싶은 유니크것들이 가득했다. 구석과 바에 앉은 몇 팀의 손님이 보인다. 가게에 여러 번 왔는지 편안히 바닥에 누운 대형견 한 마리까지.


바 안에는  여자가 손님의 대형견의 얼굴을 비비고 있다. 오늘 강연 포스터 안에 웃고있던 머리 짧은 사장이다. 누가 손님인지 주인인지 잠시 헷갈릴 만큼 스스럼없어 보이는 관계. 어차피 술 마실 거, 어차피 놀 거, 돈 벌면서 한다는 강연자 말은 사실이었다. 어지럽게 붙은 사진들과 수많은 친목모임이 이 가게를 버티는 기둥 같았다. 별거 아닌 공간에 별거를 만들어놓은 셈이다.


투올을 파네?! 덴마크의 수제맥주인데 가격도 비싸고 찾는 이가 많지 않아 국내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상품이다. 반가운 마음에 산타 고제 잇 올골라 창가 바에 앉았다. 피스타치오 하나요.


가게 네온사인이 반사되는 창 너머로 환히 불을 밝히고 있는 작은 가게들이 보인다. 언젠가는 나도 내 가게를 하고 싶어. 상상일 땐 알지 못하는 자영업자의 마음.  많은 가게 안에 평생 모은 돈과 시간과 노동력을 바친 사장들이 머무르고 있다. 딱히 손님이 더 오지 않아도 약속된 시간보다 먼저 불을 끌 수는 없는 공간이다. 


! 그 가게 없어졌네? 가게 앞을 지나가던 행인은 1초 정도 폐업을 인지하고 지나친다. 다음엔 뭐가 들어오려나? 우리가 스쳐간 그 많은 가게들의 평균 생존기간은 1년 남짓. 임대차기간 2년을 겨우 버티고 폐업하는 가게는 셀 수 없이 많다.


아무 생각 없이 가다, 안 가다를 반복하다 스타벅스로 향했던 많은 날들이 떠오른다.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았지만 가끔 가던 동네 커피숍 사장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오랜만에 만난 덴마크산 맥주 도수가 좀 높았나 보다.


피스타치오는 이게 마지막이라, 그냥 드세요. 8,900원. 가격표도 떼지 않고 봉지째 놓인 남은 피스타치오. 신기한 가게다.


내일 저녁에 뭐해요?

대리의 톡. 핸드겉에서 보이는 문장을 읽고 다시 내려놨다. 가끔 시답지 않은 물음을 건네는 그의 연락 다음날 출근길에 답하기로 한다. 


마지막 남은 고제 맥주 모금에 피스타치오 두 알. 톡이 울렸다.

아는 형이 가게 오픈했다는데, 같이 갈래요?

모던한 느낌의 선술집 사진이 같이 와 있었다.


가끔은 바로 답장해야겠다.

이전 04화 노하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