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같은 장소를 가면 처음의설렘은 사라진다. 평일엔늘 유니폼처럼 되어 버린 패딩과 같은 색으로 여러 개 구매한 정장바지에 튀지 않는 색의 셔츠를 입고 출근했다. 눈 화장은 자주 건너뛰었고, 어떤 날은 옆구리에 보풀이 살짝 난 카디건을 버릴까 고민하다 그냥 걸치고 갔던 적도 많다. 사실 평일의 나의 매무새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토요일 낮 3시. 약속시간을 3시간 앞두고 분주하게 준비를 하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늘 보던 사람과 만나는 자리인데.. 치마를 집어 들었다가 청바지로 바꿔 들었다. 스타킹신을 정성까진 필요 없을 것 같다. 새로 산 하늘색 니트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는 용산역에서 멀지 않았다. 역에서 내려어둑해지는 길을 조금 지나니 데이트 나온 커플들이 북적이는 거리가 나온다. 여기가 용리단길이구나. 수년 전 왔던 용산에 대한 기억은 커다란 쇼핑몰과 삭막한 전자상가가 전부였다. 지금은 눈길을 사로잡는 아모레 사옥을 등지고,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가게는 보내줬던 사진 그대로였다. 가로 폭이 사람 걸음으로 세 걸음정도 나오는 작고 모던한 일본 스타일 선술집. 기다리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나무 문을 살짝 밀고 들어갔다.나무 결이 느껴지는 바와 미색 벽, 노란 불빛이 포근한 느낌을 준다.
어서 오세요! 하얀 두건을 두른 마른 체구의 남자가 활기찬 목소리로 반긴다. 어떤 가게를 가도 그 가게 주인인지 아닌지는 맞이인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주인은바에앉은 남자와 친분이 있는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다. 민 대리의 뒷모습. 세미 정장을 입은 모습만 보다가 아이보리색 니트를 걸친 그가 조금 낯설다.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옆에 앉으라고 손짓한다.
시간약속이 칼이네요.
언제 왔어요?
얼마 안 됐어요.뭐 먹을래요?
여긴 시그니처가 뭐예요?
어묵이랑 가지래요.
그럼 그걸로 해요.
술은? 참고로 여긴 와인은 없어요.
다른 것도 괜찮아요.
사케 어때요?
좋죠. 근데 전 사케는 잘 몰라요.
잘 모를 때는 그 가게에서 제일 비싼 거로 마시면 돼요.사장님!
이 작은 가게에20만 원이 넘는 사케라니.그걸 주문하는 게 아니라고 붙잡으려다, 주문받은사장의 뒷모습이 신나 보여서 바꾸겠다는말을 못 했다. 아마가게 오픈하고 손님에게 나가는 첫 번째 재고일 것이다.
뭐 준비하고 있죠?
어떤 거요?
와인샵? 아,생각은 하고 있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그래 보여요. 저도 이런 쪽에 관심이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 오자고 한 거예요?
그래서 나온 거잖아요?
그의 말이 맞다. 요즘나의 관심은 창업이다. 다른 가게 사장님의 강의를 다니고 동네 부동산에 나온 매물을보러 다녔다. 회사엔 비밀로 하고 스파이처럼 은밀히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형이 조언 좀 해줘요. 예비 창업자한테.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전의 회사 동기에요. 합숙 교육 같이 받으면서 좀 친해졌어요. 지금은얘는 이직하고, 저는 회사를 나가고. 여긴 혼자 하는 건 아니에요. 엄마, 누나까지 셋이서 해요. 오픈은 저녁 6시이지만 준비는 낮 12시부터,다 정리하고 가면 새벽 2시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첫 창업이라는 생각이 안들만큼 센스가 묻어나는 가게였다.여러해 동안 준비한 누나의 솜씨로 가게의 분위기와 메뉴를 갖추고, 그의 활기찬 영업력으로 꾸려가고있었다.야채와 각종 재료를 받아 손질하고 육수를 끓이는 것부터,일하는 시간은회사보다 더 길지만 여기가좋다고 한다.지인이 아니면 듣기 어려운 가게의일,비용, 수익까지 그가 겪은 많은 것을압축적으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