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홍대는 미지의 세계의 출입문 같은 곳이다. 금요일밤이되면2호선 홍대역 KFC앞에술과 춤과 음악을 쫓아젊은이들이 불나방처럼 모였다. 나이트가 한물 간 유행이라면, 클럽은 신문물이었다. 왼쪽 팔에 클럽데이 팔찌 하나만 차면 이 동네 클럽을 어디나 다 들어가 볼 수 있었다.첫차시간까지 놀아도 신나고 즐거웠다.
서른이 넘은 후 부턴 홍대 근처는 거의 가지 않았다. 쿵쿵 울리는 비트가 카타르시스보다는 피곤함을, 시끄러운 술집의 소음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홍대에서 한남으로, 강남에서 청담으로. 조금 더 비싸도 더 한적한 곳으로 자연스레 이동했다. 조용한 곳에서 와인이나 위스키나 한 잔 하는 게 마음 편하다. 나이듦의 증거일까?
뒹굴거리며 SNL 그 시절 쇼츠를 보다가, 문득 엄마의 소위 노는 시절은 어땠을까궁금해진다. 다음 세대는 우리의 노는 시절을 기록물로 유추할까?
첫번째 시장조사지는 연남동에 핫한 와인샵이다. 요즘은 이곳을 홍대보다는 연남으로 더 많이 부른다. 와인샵 이름은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 산지 이름었는데,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생소한 이름이다. 이 샵을 찾아낸 민 대리 역시 대화 중에 가게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낸 적이 한 번도 없다.
가게는 25평 정도였다. 흰 진열장과 원목 테이블과 유리. 단순한 인테리어이지만 벽을 가득 메운 와인병 자체가 인테리어가 되는 곳이었다. 선반에 와인을 종류별로 놓고 조명만 잘 쏘아도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샵이다보니 와인은 저렴하지 않았다. 연남동 스타일에 맞게 인스타 각이 나오는 예쁜 디자인을 가진 상품이 많이 눈에 띈다. 연필로 사각사각 쓴 것 같은 듯, 라벨이 힙해보이는 그려진 와인을 하나 골라 자리를 잡았다.
주변 인테리어와 와인을 유심히 살펴보는 사이, 그는 그저 신기한 듯 와인의 라벨을 읽고, 서빙된 와인의 냄새를 맡아보며 두리번 거렸다.마치 오랜 만에 산책나온 강아지처럼.
와인은 잘 안 마시죠?
거의 몰라요.
여긴 어떻게 찾은 거에요.
검색은 잘해요.
와인을 1도 모르는 사람과 와인샵 시장조사라니. 신기한 상황이다. 이곳은 구매한 와인을 소정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바로 마실 수 있다. 안주는 대체로 조리가 간단한 것으로 구성되어있지만, 꽃처럼 깎아 만드는 테트 드 무안 로젯 치즈를 대표 메뉴로 내놓으며 또 하나의 인스타샷을 놓지지 않는 영민함이 있다.
와인을 받을 때는 이렇게 잔 밑에 손만 살짝. 첨잔은 상대방이 잔을 다 비우기 전에.
그럼 누가 얼마나 마셨는지 알 수가 없네요.
맞아요. 누군가 빨리 마시면 많이 먹게 되겠죠.
천천히 색을 먼저 보고, 향을 맡아보고, 마시면서 질감을 느껴보는 거에요.
어렵네요.
그냥 내 입에 맛있으면 맛있는 거에요.
이 건 맛있네요. 이런 지식도 알면 좋은 거겠죠?
여자 만날 때 유용할 거에요.
MBTI, E성향이 충만한 직원에게 와인이 처음인 민 대리의 눈 높이에 맞춰 설명해달라고 하니 쉽고 재미있게 와인 이야기를 해 주셨다. 덕분에 평일과 사뭇 다른주말 시장조사가 어색해지지 않아 다행이다.
지금 드시는 와인 라벨엔 이렇게 적혀있어요. 이 와인은 내 친구들과 대학교에서 만들었어. 프랑스 와인은 너무 지루했기 때문에. 우리만의 풀바디 레드 블렌드 와인이야. 늦은밤 방탕하게 여자들과 마시기 좋고. 혹시 우리 와인이 더 필요하면 내게 전화해 줘.
입 안에 한 껏 섹슈얼초콜릿을 머금었다. 라벨 속 와인메이커가 말 한대로 쉬라의 풀바디감과 진판델 과실향의 잔담감이 진하게 올라왔다. 직원은 본인이 해외에서 공수했다던 희귀 와인까지 꺼내 보여주며 와인에 대한 애정을 쏟아냈다.
와인 이야기도 재미있네요.
찾아보는 재미도 있어요. 맛도 다 다르구요.
호기심이 많은 것 같네요.
그런 편인거 같아요.
그래서 이것 저것 공부하고 찾나봐요.
근데 흥미도 금방 떨어져요. 결국 성공은 그게 핵심인 거 같아요. 사람도 일도 꾸준히 좋아하는 거. 그래야 뭐가 되더라구요.
굳이 전부 다 성공할 필요는 없어요.
그저그런 반짝 핫플이려니 생각하다 직접 와보고 많은 생각과 메모를 했다. 마개를 열어둔 와인의 맛과 향은 조금 더 풍부해졌다. 남은 와인은 오크향과 바닐라향이 어우러져 좋은 마무리감을 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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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해 주세요.
저도요.
가입하게요?
이제부터 알아가려구요.
가게를 나오자마자 발송되는 가입 감사 메시지. 작은 가게이지만 한 번 온 손님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가게를 열겠다는 무모한여정의 처음엔 할 수 있을까? 의문문이었다. 지금은앞으로 어떻게 될까? 궁금함으로 바뀌고 있다. 첫번째 시장조사는 목적에 충실했고 알찼다.
참고할 만한 인사이트와 맛있는 와인, 그리고 알고 있었지만 다시 알게 된 사람까지.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