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벽돌집과 잿빛 빌라가 적당히 섞인 곳. 이렇게 조용하고 익숙한 주택가에 MZ들이 찾는 와인바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굽이굽이 주택가를 지나 도착한 곳에, 간판이라곤 흰 벽에 손바닥 만한 빨간 로고만 하나 붙어있다.
샵보단 바를 하는 게 나을까요? 홍대 와인샵에서 그 날 즐거웠던 기분에 나온 말이 지금 이 구석진 동네의 와인바까지 오게 한 것 같다. 검색은 잘해요. 그의 검색 능력은 단순히 장소를 찾는데 그치지 않고, 스쳐간 대화 중의 뼈를 찾아 조합하는 재주가 있다.
가게는 2층. 바깥은 조용해도 안은 시끌벅적하다. 벽은 흰색으로 통일하고 하얀색 탁자 역시 가장 저렴하고 심플한 것들로 채워져있다. 밝은 낮에 보면 분식집같겠지만, 적당히 어둑하고 은은하고 활기찬 이 곳은 힙플레이스 와인바였다.
안주가 신선하고 와인 값도 꽤 저렴해 웨이팅도 잦은 곳이다. 수익 비결은 시간당 자릿세이다. 세상엔 다양한 방식으로 돈을 버는 방법이 있다.
다들 저걸 먹네요.
우리도 같은 걸로 시켜요.
메뉴는 와인을 고르는 사이 금방 나왔다. 큼지막한 새빨간 생 참치와 노란 계란말이가 절반씩 들어가있는 생참치김밥과 회색 얼룩무늬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빨간 떡볶이, 그리고 듬성 썰어놓은 양배추에 땅콩버터가 곁들여진 야채까지. 어딘지 분식집스러우면서도 독특한 메뉴들이었다. 와인은 맛도 병 그림도 화사한 제싸미로 골랐다.
이건 단 술 아니에요?
단 건 싫은데, 제싸미는 좋아해요. 제싸미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이 꽃 이름인가요?
까딸루냐 어로 자스민이라는 뜻이래요. 정말 자스민, 카모마일같은 꽃 향기가 나요.
병에 그려진 하얗고 여리여리한 자스민 꽃잎처럼 입안에 대자마자 퍼지는 실크같은 부드러움과 꽃향기가 아름답다. 꿀향과 미네랄리티 가득한 청량감이 식전주로 잘 맞는 화이트 와인이다.
담배 피우는 남자는 싫다고 했죠?
좋아하진 않아요.
냄새 때문에요?
아뇨, 의지가 약해보여서요.
그건, 맞는 말이네요.
상관하지 않는 여자를 만나면 되죠.
누가 그랬잖아요. 20대 때는 한 가지만 끌려도 만나는데, 30대에는 그 많은 것 중 딱 한 개만 걸려도 멈칫하게 된다고.
대리님도 그런가요?
예전보다는요
다른 장점이 많잖아요. 그걸로 어필하면 되죠.
와인 한잔과 생참치 김밥 한점을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청량감과 바다 향이 입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기분좋은 취기를 만들었다.
창밖으로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간 그가 내려다 보인다. 담배를 피울 때면, 누군가와 전화를 한다. 망설인 지점은 담배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코트에 밴 담배향은 스코틀랜드 이탄향을 머금은 라가불린 위스키에서 느낀 향기로움에 가깝다. 그렇게 대답하진 않았지만. 서른을 훌쩍 넘긴 남녀의 대화는 이리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