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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인미장원 Oct 14. 2024

을지로

진동

간판이 없어야 한다. 찾아가기 어려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면 더 좋다. 을지로의 가게들은 새로운 곳조차 낡은 느낌을 내기 위해 노력한다. 오랜 옛 흔적을 살린 인테리어, 2층, 3층, 심지어 1층에 어떤 표시도 없이 옥상에 자리한 패기 있는 곳도 있다.


간판을 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던 시절은 끝났다. 친구와 약속을 잡더라도 네이버 지도나 캐치테이블부터 연다. 많은 사람이 원할 수록, 어렵게 예약하고, 오래 기다릴수록 그곳에 간 나의 가치가 올라가는 기분이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죠?


자연스러웠다. 한쪽이 엄청난 의도와 정성을 담고 있지 않아 부담이 없었다. 회사 밖에서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와 분위기는 회사 안에서의 교류와 확연히 달랐다. 밖에서 마주칠 땐 마치 어제 본 사람과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같.


을지로 3가 역 지하철 입구를 내리니 그라피티가 가득한 골목 한쪽에 서 있는 그가 보인다. 오늘 가는 와인바는 멀지 않지만 지도를 봐도 찾아가기 어려운 골목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얼마 전 읽은 책 때문이었다. 사장이 10명인 을지로 와인바 창업기를 소소하게 잘 풀어간 수필이다. 평범한 이야기지만, 나라면 이라는 생각에 재미있게 읽었다.


소주 없음. 개조심처럼 무심하고 투박하게 쓰여 있는 정문이 정겹다. 요즘 문물인 온라인 웨이팅을 받지 않아, 현장 대기 밖에 안 된다. 기다림도 레트로인가. 10~20분 내면 자리가 날 것 같다는 말에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춥지 않아요?

괜찮아요.


지이잉. 어느 순간부터 부쩍 대화가 적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대화는 두 사람의 몫이다. 누구 하나 느낌과 주제를 벗어나면 더 이어질 수 없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영역이다. 서로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던 만남 초반엔 호기심 가득한 질문이 오고 갔다면, 지금은 잠깐 사이 흐르는 침묵이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지이잉


받아요.

괜찮아요.


핸드폰 진동은 다섯 번가량 울리면 잦아든다. 말하지 않아도 다음 상황을 알 것 같다. 곧 자리가 날 것이고, 자리에 앉아 메뉴를 정하고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그는 잠시 자리를 비울 것이다. 그리고 담배 한 대가 다 타들어가는 시간만큼 지나 돌아올 것이다.


가게는 철거하고 그대로 남겨둔 벽어두운 편에 속하는 따뜻한 조명, 낡은 피아노와 저렴하지만 꽤 잘 어울리는 탁자들이 놓여있었다. 문 옆에는 와인셀러와 책들이 놓여있고, 큰 거울 앞에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여자가 보인다. 속눈썹을 과하게 올리지 않아도 그 나이 자체가 예쁘고 귀여운 나이의 손님들이 여럿 보인다.


와인리스트는 어린 친구들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가격에 먼저 초점을 맞춘 느낌이. 다소 저렴한 판매가 안에서 수익을 발생 시킬 수 있는 와인들로 구성된 듯 하다. 적당한 가격의 와인, 포근한 조명과 깔끔한 안주, 톤 다운 된 음악으로 누구나 올 수 있는 부담 없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레드와인 한 병과 치즈플래터를 주문했다.


이제 가게 컨셉은 정했어요?

조금은요.

바 말고 샵으로?

네.

어떤 느낌인데요?

짙은 색깔 벽에 쨍한 색깔의 등이 3개 놓인 카운터, 여기까지만 생각했어요.

와인?

꼭 가져가고 싶은 리스트는 생각해두었구요, 전체적으로 가게는 어두운 느낌, 와인 쪽은 빛이 밝으면 좋을 것 같아요.

간판 할 거에요?

전 옛날 사람인가 봐요. 크진 않아도 꼭 있었으면 해요.

그럼 로고가 있어야겠네요.


까베르네소비뇽. 주문한 와인이 나왔다. 와인 리스트가 다 마음에 안 드는 곳에선 가장 무난한 품종을 주문한다. 적당히 진하고, 적당히 떫은 아는 맛 그대로의 향과 맛을 지녔다. 주변이 어두워서 인지 붉은 와인이 더 검붉게 보인다. 적어도 실패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가게 이름은 정했어요?

언니랑 한 30개 정도 적어봤는데 아직이요.

골라줄게요.

됐어요. 웃긴 이름들이에요.


메모지 한 장과 펜을 얻어와 와인샵 이름을 여러 개 적었다. 와인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물결무늬, 영어, 한글. 다양한 조합을 시도하다 칸이 모자랐는지,  장을 더 얻어왔다.


래 이렇게 열심히 안 하는데,

알아요. 원래 안 그러는 거

왜 그런 걸까요?


그가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그의 시선을 피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이 치즈 먹어봤어요? 엄청 잘 어울려요.


그가 치즈를 집어 들었다. 조금 많아 보이는데.. 향이 강한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난 웃었고 그는 다시 그리기에 열중했다. 탁자 위에 놓인 그의 핸드폰이 드르륵 울린다. 진동의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그는  어떤 핑계로 다시 자리를 비울 것이다. 난 두 와인잔에 와인을 고르게 따를 것이다. 와인잔을 빙 돌리면, 검붉은 와인은  안에서 휘돌고 다시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곤 잦아들 것이다. 은은하게 향을 조금 퍼지기 시작하고, 평정심을 찾아가는 와인을 바라볼 것이다.


그가 두고 간 흩어진 메모지를 보았다. 집, 와인, 와인병, 치즈그려져 있다. 와인잔 안에 글자를 담은 메모지를 한 장 집어 들었다. 옅은 미소. 병 안에 남은 와인을 모두 따랐다. 한 병에 꽤 많은 와인이 들어있을 것 같지만, 마음 안에 담은 대화를 다 나누기엔 한 병은 조금 모자라다. 


메뉴판을 펼쳤다가 덮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어린 나의 미소에 스스로 반하는 나이가 아니었다면, 한 병 더 주문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난 알고 있었다. 오늘이 그와 마지막 미팅이어야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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