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잭 소블 12, 포티 포트 12.일상이 조금 달라졌다. 이제 퇴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지하철에서 와인플랫폼을 둘러보고, 낮 동안 배송 온 와인을 정리하고, 손길이 닿지 않았던 곳의 먼지를 닦아낸다.
신림역 지하철 4번 출구에서 걸어서 8분. 벽은 짙은 녹색으로 둘러져있어 어두운 느낌이지만, 기둥과 문에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더해 무거워 보이지 않게 마무리했다.가게는 어두운 편이지만, 와인 진열장은 전구색 LED밝은 빛 아래 있어 눈에 잘 들어온다. 언젠가 농담처럼 이야기했던 노란 카운터 위엔 카드결제 기능만 갖춘 단출한 포스기와 샛노란 전등 세 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지금 보면 멀쩡한 가게이지만, 처음엔 인테리어 업자들도 시공도 하기 전에 고개를 저었다. 제일 사기 안 칠 것 같은 대표로 결정했는데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멀쩡한 허우대를 믿고 도장 찍는 게 아니었는데.
처음 받은 도면은 벽과 바닥만 겨우 마감한 매력 없는 도면이었다. 적지 않은 예산이었는데, 끝나고 보니 시공내용 대비 사기에 가까울 정도로 비싸게 작업된 케이스였다. 운영을 하다가 와인장이 무너져 진열되어 있던 와인 한 줄이 다 깨지는 일도 있었다. 인테리어 대표는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않았다.
답 없어보이는 도면을 구제해준 건 언니였다. 언니는 오래전 미술을 전공한 전업주부이다. 업에서 손을뗀 지는 15년도 넘었지만, 그녀의 집 안의 모든 것은 물건 하나조차 평범한 것이 없었다. 요리 그릇 하나에도, 액자와 식탁보 하나를 만들어도 감각이 살아있었던 그녀.집 안에서만 쓰긴 아까운 실력을발휘한 건, 동생네 가게에서 였다.
그새 좀 말랐네. 지하에서도 잘 자란다며 개업날 가져온 언니의 화분은 일 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잘 살아있다. 집에 있던 스투키도 곧잘 죽이던 내가 특별히 신경 쓴 건 없었다. 한낮에 볕이 드는 시간이 한 시간도 채 안될 텐데, 꽤 기특한 녀석이다.
와인을 정리하고 탁자에 앉았다. 작은 가게에 비해 꽤 욕심을 부린 기다란 원목 탁자이다. 가끔은 홀로 가게에 앉아 조금씩 진화하는 와인장을 바라보며, 책을 읽거나 와인 한 잔을 기울인다. 오늘은 가격도 맛도 부담 없는 체코와인 타야 샤도네이를 골랐다. 샤도네이인데 상큼한 리치향이 느껴져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는 독특한 와인이다.
예쁘지만 조화롭진 않네.
언니가 지금 진열장을 봤다면 그랬을지 모른다. 이 작은 와인샵에 포트와인이 한 줄을 다 채우고, 콥케 처럼 대중적인 애들은 자리가 없어 다른 칸으로 진출해 있다. 화이트 코너엔 그린와인과 체코와인이 모스카토보다 많고, 레드 한 편엔 좋아하기 시작하면 집안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피노누아가 모여있다. 기둥을 보전하면서 즐길 수 있는 가성비 피노들로 구성했다. 좋아하는 와인한 잔 하며불완전한 와인장을 바라보는 건, 하루 중 가장 완전한 순간이다.
신림은 그 어느 도시보다 젊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의 젊은 1인 가구가 많다 보니 유행과 가격 모두에 민감하다. 가까이 지내는 단골 편의점 사장님은 인스타 신상품을 제일 먼저 넣는 것을 가게 경쟁력으로 삼을 정도이다. 오늘도 두바이와 스모어초콜릿을 풀 발주로 넣었다고 좋아라 하셨다. 1인 1개 구매. 야무지게 메모를 적어두셨지만, 나에겐 2개를 사도 된다고 귀띔해주셨다.
일 년 정도 운영하다 보니 우리 가게도 가격 기준이 생겼다. 1만 원에서 3만 원 이하. 타야도 2만 원 초반대이다. 그러면서도 디아블로처럼 누구나 쉽게 사고 아는 와인은 아니어야 하는 게 살짝 어려운 지점이다. 지금은 오픈 초기 준비했던 중가 이상의 와인들을 모두 정리하고, 매일 마시기 부담 없는 가성비 좋은 내 스타일 와인으로 구성하고 있다.
다른 건 다 정리해도 인스피레이션 게브르츠라미너는 포기할 수 없어 내추럴 코너에 자리하고 있다. 한 번씩 생각나서 마시는 와인인데, 가게를 오픈하고 한 병 팔린 게 전부였다. 문을 닫는 그날까지 안 팔려도 괜찮다. 내가 마시면 되지, 뭐. 농담은 현실이 되었다.
타야 한 잔을 마시며 그동안 다녀온 서울의 작은 가게들을 떠올렸다. 나에게 영감을 주고 때론 설렘을 주었던 가게들. 한남 병맥주샵, 용산 오뎅바, 이태원 전통주바, 홍대와 자양, 을지로의 와인바까지. 가끔 궁금한 마음에 가게들을 지도에서 클릭해 본다. 그곳의 빛, 온도, 와인과 술잔의 느낌.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써 내려간서울의 술집들은 이제 단 세 곳을 제외하면 모두 폐업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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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정말로 많이 감사했습니다.
잊을만하면 오던 와인샵 문자 메시지. 일상을 지내다 이벤트 문자를 받을 때면, 그래 곧 크리스마스구나, 발렌타인이구나 싶었다. 부지런한 분이었는데, 그게 마지막 메시지 였다.
그동안, 정말로, 많이라는 몇 가지 단어로 수년간 열정을 쏟은 가게를 접는 주인의 마음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오픈하기 전부터 공부하고, 고민하고, 업자와 고객을 만나고, 실랑이하고, 기뻐했을 그 많은 순간들을 어찌 한 두 문장으로 정리할까?
코로나를 기점으로 유독 버티던 작은 가게들의 작별인사가 많이 보인다. 문자와 인스타로 연결된 얼굴도 희미한 고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 하는심경은 얼마나 복잡할까?고객으로 다녀온 순간들 조차 두세 단어로만 정의할 수 없는데..
아무리 도수가 약해 보이는 와인도 한 병을 혼자 다 비우면 곤란하다. 게다가 요즘은 민 대리가 신혼여행으로 자리를 비운 덕분에 일이 두 배가 되었다. 그저 그가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
다음 달부터는 쓸데없이 크기만 큰 탁자를 유용하게 써 볼 예정이다. 방법은 내일 저녁, 숙취가 사라지고 난 다음생각해볼까한다.
그저 별것 아닌 가게의 일상을 오래 오래 토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서울, 신림동 와인샵에 앉아 끄적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