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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인미장원 Jan 07. 2024

편의점

디아블로와 앙시앙땅

스스로 와인을 찾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회사에서의 시한부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런 찹잡한 마음을 조잘거릴 남자조차 남아 있지 않.


9,900원이에요. 행사는 내일 끝나구요. 자주 가는 편의점 주인이다. 진열대 위에 놓인 악마모양의 라벨의 디아블로, 또 행사 중인가 보다. 신림역에서 내릴 때 가끔 집과 반대방향인 이곳으로 향한다. 가게에 도착하기까지 이 짧은 거리에도 편의점이 빼곡하다. 네 가지 각기 다른 색의 간판과 홍보물로 고객의 한 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파란색 간판인 이곳에 가는 이유는 언제 가도 나의 차림새나 구매 품목에 대해 먼저 아는 체하지 않기 때문이. 매일 비슷한 시간에 와서 잘 안 팔리는 와인들을 한 병씩 처분해 가는 나를 모를 리가 없는데... 단골이 많아 보이는 주택가 깊숙한 상권인데, 주인 고객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걸 본 적이 없다. 사장이 일러놓았는지 다른 직원들도 고객이 먼저 묻기 전까진 개입하지 않는다. 


오늘 어디 가시나 봐요~ 멋진 차림새나 외적인 칭찬을 들은 고객은 다른 날 거지꼴일 땐 나를 아는 가게엔 편히 갈 수 없다. 꽤 오랜 기간 편의점을 운영한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은 고객을 쫓는 스몰토크의 불필요함을 알고 있는 듯하다. 고객이 바라는 이상적인 편의점 나를 모르되, 나의 기호는 눈치채고 미리 준비해놓아야하는 어려운 구석이 있다.


무심해보여도  가게는 친절하다. 상품 앞에서 10초 이상 망설이거나 무언가 찾는 눈치이, 슬쩍 다가와 구매에 필요한 말을 하고 물러난다. 그날 매장에 없는 품목은 화이트보드에 적어두면 다음번 방문 때 살 수 있다. 사장이나 직원 한두 명이 오픈부터 마감까지 하는 와인샵을 들를 때 와는 다른 편안함이다. 입장할 때부터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나를 주시하는 . 몇 병 못 팔았을까?소리 없는 구매 호소의 눈빛을 뒤로하고 빈 손으로 가게를 나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국에 5만 개나 널린 편의점이지만, 적절한 친절과 필요한 상품이 정갈하게 놓여있는 곳은 많지 않다. 대형마트에 갈 정성과 시간이 부족한 내게 와인은 여기면 충분하다.




나도 모르게 매대 앞에 오래 머물렀나 보다. 편의점 주인 추천한, 아니 기억한 디아블로 칠레에서 가장 많이 팔린다는 1만 원 내외의 대중적인 레드 와인이다. 매번 이게 원래 얼마 짜리인데 얼마에 샀다고 뿌듯해하던 구남친이 자주 사던 상품이 맞. 주인이 기억할 정도로 자주 샀었나? 썸 탈 땐 프랑스 브루고뉴 무슨 샤또에서 나온 걸 가져오더니, 해가 갈수록 더 싸고 가성비 있는 것만 챙겨 오던 자식. 원래 저렴한 걸 저렴하게 사는 건 그다지 흥이 나지 않지만, 가성비는 최고라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와인이다. 그놈의 가성비, 지겹다.


그때  술의 맛을 음미하던 때가 아니라 붉은 고기에 붉은 와인이면 어 것이든 괜찮았다. 비슷한 붉은색이어어도 어떤 것은 맑고 어떤 것은 진하고 어떤 것은 투명한 색감이다. 코르크를 따면 퍼지는 진한 향. 그게 자두향인지 블랙 커 런스향인지 잘 모르지만, 녹색 병이든 투명한 병이든 맛과 향이 거같은 소주보단 분명 개성 있는 것들이다. 구운 고기를 담은 입에 붉은 한 모금을 머금으면, 둘의 향과 질감이 배가 된다. 싸구려 와인도 없는 것보다 낫다.


그놈 덕에 와인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간일 수도 있다. 가져오던 와인의 맛이 점점 단순해지고, 갈수록 디아블로를 자주 꺼내 놓은 이유를 이제는 안다. 그저 어떤 편의점에 가도 재고가 있고, 행사도 잦아 저렴하고 무난했기 때문이다. 새벽 오픈런으로 공수한 고급 와인은 새 연인에게, 가성비 높은 건 헌 연인에게. 오늘은 또 얼마나 비싼 걸 얼마나 저렴하게 사시려나. 없는 게 더 나은 그 인간과 헤어진 뒤, 난 디아블로를 마시지 않는다.


브레드 앤 버터 피노누아. 검은색 마카로 화이트보드에 끄적였다. 지난주에 한 병 본 것 같은데 그새 팔렸나 보다. 디아블로 옆에 있던 앙시앙땅을 짚었다. 1만 원대 프랑스 와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이다. 와인 병이 남들보다 살짝 더 살이 올라있어 늘 검은 쇠걸이 매대가 아닌 하얀 선반 위에 세워져 있다. 종류가 조금 더 많으면 좋을텐데. 어렵게 찾은 나의 보물 가게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다.


같이 마실 사람을 찾기엔 시간이 늦었다. 앙시앙땅둘이 귀가하는 마음이 헛헛하다. 적절하게 친절한 누군가가 필요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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