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없는 년. 얼굴은 웃었고 속은 쓰렸다. 먼저 진급한 후배에게 건넨 축하인사였다. 괜찮아? 눈빛으로 위로하는 동료들에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 오랜기간 회사를 다니다 보면, 나의 기분을 패스하고 주변 분위기에 맞추는 건 쉬운 일에 속한다. 인생이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진급 발푯날. 결과가 시간에 비례하지 않아서 마음이 쓰렸던 걸까? 누군가 나의 세월과 능력을 추월해 먼저 앞서갔다는 건, 나도 이 조직에서 퇴물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의미일까?
사회는 학교와 다르다. 후배 팀장 밑에서 일하는 머리 훤한 부장님. 연락이 안 된 사이 이 동네 가장 비싼 아파트에 사는 동창. 이직하고 성과급 포함 1억을 찍었다는 소식을 전한 옛 동료. 그저 착실하게 일만 했는데 벼락거지가 되어버린 것 만 같은 기분. 직접 보고 겪기 전까진 나에게만 불공정한 것 같은 사회의 다른 면을 이해할 수 없다. 억울한 마음을 안고 잠들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쨍한 알람 소리에 기계처럼 일어난다. 그렇게 출근한 지 13년이다.
김 과장, 이거 말이에요. 지난번에 얘기한 대로 했는데 잘 안되네?
이 부장이다.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담배 냄새, 그가 가까이 온 건 코가 먼저 안다. 드라이클리닝을 해도 빠지지 않는 깊숙이 배인 담배 냄새. 그는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담배를 태웠을 것이다. 엊그제 알려준 걸 또 물어보는 걸 보니, '일 조금 - 담배 자주' 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존댓말과 반말이 묘하게 섞인 부장의 하찮은 물음을 답해주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처리했다. 어느새 퇴근할 시간. 10년 넘게 같은 일을하면 일이 손에 붙는다. 어떤 때에는 내 안에 작은 양심이 이렇게 일하고, 남의 돈을 벌어도 되나 싶은 마음이 생긴다. 물론 이내 이런 미친 생각은 금세 떨쳐내 버리고 가방을 챙긴다. 칼퇴근. 몇 해째 도전한 진급을 또 누락시킨 회사에 대한 작은 복수이다.
건물 밖은 어스름했다. 퇴근 무렵 하늘이 밝으면 여름, 어스름하면 겨울이다. 오전부터 낮 시간 내내 사무실 안에 있다 보면, 여름과 겨울의 체감은 퇴근 무렵이 되어서야 느낀다. 출근할 때 꼬박꼬박 바르는 자외선 차단제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은 입구에 가기 전 거리부터 붐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회사로 향하고 일을 하고 다시 집으로 가는지 궁금하다. 지금 가면 분명 전동차 3대 쯤보내도 겨우 끼어 탈 것이다. 어떤 과정으로 실려갈지 뻔한데, 바로 집에 가기 싫은 날이다.
근처에 옛 동기가 운영하는 카페로 향했다. 그녀의 카페는 여덟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심플한 하얀 벽, 비싸지 않은 테이블과 탁자가 놓인 소박한 곳이다. 세련되지 않은 로고와 메뉴판이 정겨운 커피숍. 회사 다닐 땐 늘씬한 키에 웨이브진 머리카락, 작은 얼굴과 시크한 표정으로 많은 남자 동료들의 관심을 받았던 친구였다. 이젠 끈으로 동여맨 머리에 캡모자, 앞치마를 두르고 반겨준다. 2년 사이 여느 커피숍에서 볼 법한 어엿한 사장님이 되어 있었다.
근본이 없어.
이제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주변 가게 사장님들과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 90%가 거짓말인 국밥집 사장님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치근덕 대는 이자카야 사장. 이혼하고 가게와 아이를 도맡아 꾸려간다는 프린터가게 사장 이야기까지.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는 순간부터 풀어내는 이야기보따리가 흥미롭다.
우리는 회사원 출신이잖아.
동기는 매일 그들과 함께하면서도 매번 마음속에 선을 긋는다. 회사원의 근본이 무엇일까? 속상해도 우아하게 미소 짓는 포커페이스일까. 장사꾼이 아니라 브랜드를 기획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일까? 그게 그녀를 이 작은 가게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자존감일 수도 있겠다. 신 메뉴로 준비한다는 밀크티를 한 잔 더 내왔다. 4시간 우린 찻물에 비법 재료들을 혼합해 만든 음료라고 했다. 밀크티도 해?뭐라도 해야지. 차 우리는 게 보통 귀찮은 게 아냐.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서 그런지 더 맛있네. 그래? 이런 거라도 해야지. 매출이 계속 떨어진다. 접기는 아쉽고 계속하자니 힘들고, 그래. 젊은 사장은 씁쓸한 미소 지었다.
있잖아 나..어서 오세요~ 잠깐만!이제그만해야 하는 걸까? 손님이 들어오자 동기는 언제 침울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밀크티를 마시며 손님을 응대하는 그녀를 바라봤다. 쟤가 회사에서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나? 내일 망해도 오늘 장사는 한다는 사장의 미소인가. 확실한 건 어떤 출신이어도 넌 잘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