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했던 꿈. 다시 도전하다!
내 힘과 노력으로 이뤄내다
나의 세 번째 잡 피아노선생님
스물둘. 벌써 세 번째 잡이라니. 뭔가 얼떨떨하고 조금 서글픈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의 서글픈 감정 따윈 사치. 그저 또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살아낸다. 피아노 학원은 내가 학생으로 갈 때와는 느낌이 완전 달랐다. 와.. 학교 마치는 시간이 되면 20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나도 아직 애긴데 더 애기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와서 짹짹 거린다. 처음에는 누가 누군지 구분조차 못하겠더니 하루하루 지날수록 이름이 외워지고 아이들의 특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몰려들어 감당이 안되던 아이들을 그룹별로 나눠 A그룹은 연습실로 B그룹은 이론 공부하는 테이블로 보낸다. 먼저 피아노 연습을 한 친구들이 레슨 피아노 앞에 줄을 서고 나는 한 명씩 레슨을 시작한다. 레슨을 하는 과정에서도 이아이 저아이 치고 들어와 질문을 하고 다양한 요구사항을 표출한다. 내 아바타를 만들어서 이곳저곳 선생님이 필요한 타이밍에 보내주고 싶을 정도로 찾아댄다. 피아노를 정말 좋아하는 1인이지만 이곳이 학원인지 시장통인지 구분이 안 되는 상황에 현타가 제대로 찾아왔다. 형식적인 레슨 시간이 반복되었고 그 누구에게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 난감했다. 시간이 흐르며 많이 적응되긴 했지만 이때 난 결심했다. '나중에라도 절대 학원은 차리지 말아야지' 레슨을 해도 개인레슨을 해야겠다고.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마음 한켠에 처박아두었던 꿈에 대한 열정이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 힘으로 대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고 어떻게 하면 피아노 전공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았다.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꼭 한 번은 도전해보고 싶었다. 월급을 받으면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모았다. 입시 레슨비와 대학 입학금, 등록금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지만 잊고 있었던 벅찬 감정이 다시 올라와 마구마구 두근거렸다.
계약직으로 재입사하다.
피아노 학원에서 몇십 명의 아이들과 고군분투하던 어느 날 이전 직장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퇴사하고 회사 분위기가 워낙 뒤숭숭해서 내 후임을 뽑지 못했던 것이다. 그 당시 회사에서는 명예퇴직으로 인해 너무 많은 직원들이 떠났고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전이라면 거의 다 정직원이었지만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후로는 계약직 형태의 고용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명예퇴직으로 회사를 떠났던 과거 인력들에게 계약직으로 재입사를 권하기도 했고 그중 한 명이 나였던 것이다.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나름 좋았고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입이라는 꿈을 다시 품은 상태였기에 급여가 더 높은 회사를 선택하는 게 낫겠다 판단했다. 1년 정도 피아노 학원에서의 선생님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회사로 재입사하게 되었다. 어차피 계약직이었고 오래 근무할 생각은 없었다. 학교를 가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데 모든 생각이 집중되어 있었다.
회사 일은 2년 동안 해왔었기에 업무적으로 어려운 건 없었다. 다만 가정형편이 급격하게 기울면서 불안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사업을 하시던 아빠께서 사기를 당하시며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것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당분간 집에 오지 말라고 하셨다. 친척집이나 지인집에 가 있으라고 어떠한 대안을 마련해 주신 것도 아니고 그저 위험하니 당분간 피해 있으라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나를 낳은 부모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구나 싶어 좌절스러웠다. 그만큼 다급한 사안이긴 했지만.
꼭 해내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하다.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한 달여쯤 친구집에서 지내며 출퇴근을 했다.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돈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아빠에게 계속 연락을 해봤자 해결이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나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회사로 불시에 전화가 걸려왔고 내 월급을 차압시키겠다고 협박했다. 협조하지 않으면 회사로 찾아오겠다는 협박의 말도 서슴지 않았다. 너무 무서웠고 이러다 부지불식간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졌다. 퇴근을 할 때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팀 내 남자직원들이 나와 동행하며 신변보호를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마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발가벗겨진듯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나의 이런 감정 따윈 그저 사치일 뿐. 그 무엇도 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었고 난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살고 있을 때 우리 오빠는 군대에 있었다. 우리 집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의도한건 아니지만 오빠는 항상 열외인데 나에게만 가혹한 현실이 서글펐고 밤마다 눈물 쏟으며 잠들었다. 그것도 내 집, 내 방도 아닌 친구집 한켠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숨죽여서 말이다.
이 일을 계기로 우리 집은 어렵게 어렵게 마련했던 부모님의 첫 집인 아파트를 팔았고 다시 비좁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슬펐다. 아주 많이 슬펐지만 그래도 이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됐고 좁은 집이었지만 내 집, 내 방에서 잘 수 있어서 감사했다. 사람이 극한의 상황으로 몰리면 평범하게 유지되는 일상이 감사해지는 법.
주경야독 목표를 향해 앞으로!
집안 사정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나는 모아두었던 돈으로 입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교수 레슨은 비싸서 꿈도 꾸지 못했고 입시 전문 학원에 등록했다. 퇴근을 하면 학원으로 바로 갔고 12시까지 연습실에 처박혀 피아노 연습을 했다. 아... 너무 오래 쉬었다. 손가락이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예전에 쉽게 되던 것들도 마음만 급할 뿐 성에 차지 않는 수준이다. 막막했다. 하지만 어렵게 먹은 마음 또다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독하게 연습했다. 또 하고 또 하고.. 될 때까지 피아노 앞에서 씨름했다. 퇴근 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피아노 앞에서 빵이나 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동안의 공백기를 채울 방법은 연습밖에 없었기에 정말 순간순간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다. 예술대학 입학전형은 피아노 실기 시험이 70% 이상 반영되지만 수능성적 또한 들어가기에 공부도 해야 했다. 서점에 가서 무작정 수능 모의고사 문제집을 샀고 12시에 집에 돌아와서는 새벽까지 수능공부를 했다.
그야말로 주경야독! 회사 -> 피아노 연습 -> 수능공부 나의 생활은 이 패턴으로 돌아갔다. 시간을 더 확보하려면 잠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고 살인적(?)인 스케줄은 몇 달간 지속되었다. 다만 두세 달이라도 입시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겠다는 생각에 수능을 앞둔 가을의 어느 날 나는 퇴사를 했다. 퇴사 이후 난 아침에 눈 뜨면 연습실로 향했고 12시간씩 피아노를 쳤다. 내 인생 무언가를 이렇게 열심히 했던 시기는 없었다. 친한 친구들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고 연락을 끊었다. 꿈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나의 열정은 다른 모든 것을 중단하게 했고 오로지 대입만을 위해 몰입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던지라 수능공부 또한 녹록지 않았다. 주요 과목은 따라갈 엄두도 못 내겠고 바짝 공부해서 성적을 낼 수 있는 암기 과목에 집중했다. 수능 성적은 딱 대에 지원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나왔다. 그나마도 어딘가. 벼락치기도 이런 벼락치기가 없었는데 말이다. 수능을 마치고 실기시험 전까지는 피아노와 한 몸이 되어 살았다.
꿈에 한 발짝 다가서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난 그토록 원했던 예술대학 순수음악과 클래식 피아노 전공 00학번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아 맞다. 당당히는 아니다. 예비합격이었는데 며칠이 지난 후 최종 합격 통보 전화를 받았으니. 뛸 듯이 기뻤고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턱걸이로 겨우 합격했으면 어떠하리! 모두가 알아주는 서울의 4년제 대학이 아니면 어떠하리! 어린 시절 지지받지 못했던 나의 꿈을 스스로 노력하여 얻어냈는데 이보다 값진 것이 어디 있겠는가! 비록 나의 꿈을 팍팍 밀어주진 못하셨지만 부모님께서도 나만큼 기뻐해주셨고 축하해 주셨다. 너무너무 대견해하셨고 한편으론 미안해하셨다. 부모로서 복잡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을 테지.. 이건 내가 부모가 된 후에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으로 입시를 치렀고 입학금과 첫 등록금을 해결했다. 이제 다시 제로였지만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좋았고 감사했다.
예대에 입학만 하면 환상의 나라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입학하자마자 난 난관에 봉착했다. 겨우겨우 피아노과에 왔는데 내가 경쟁해야 하는 과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날고 기던 친구들이었던 것. 입시곡만 미친 듯 연습해서 겨우 들어온 나와는 비교가 안되었다. 하... 좌절. 막막했고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데 포기할 순 없지. 생각을 고쳐먹고 이를 악물었다. 죽을힘을 다해 입시도 했는데 그 무얼 못하겠는가 싶은 마음에 또다시 달렸다. 새벽에 일어나 새벽예배 반주를 하고 바로 등교를 했다. 실기는 연습만이 살길이었기에 과 친구들(실은 거의 동생들)은 학교를 찾지 않는 새벽 시간부터 나는 연습실을 지켰다. 실기를 제외한 다른 과목들은 다 씹어 삼킬 듯 공부했다. 새벽 등교도 모질라 막차를 타고 하교 했다. 열심히 한 덕분에 1학기 성적은 실기를 제외한 모든 과목이 A+이었고 재학 중 전학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힘들게 대학에 온 난 절박했기에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다행이라고 말하긴 좀 미안하지만 스무 살 새내기 친구들은 대학 생활을 즐기느라 학업에 몰두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 내내 연습실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고 턱걸이로 입학했던 난 1등 과탑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늘 발목 잡던 실기 점수는 졸업연주 점수로 반영되는 마지막 학기에 당당히 A+을 받았다. 아 정말 대학 오길 참 잘했다. 칭찬해 나 자신!
떳떳하게 피아노 프리랜서 강사가 되다.
소원하고 소원하던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고 졸업장과 실기교사자격증을 득한 후 세상으로 나왔다. 꿈꾸던 피아노 전공자가 되었는데 막상 졸업하고 나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예전에 피아노 학원에서 근무했을 때를 떠올리니 다시 하고 싶진 않았고 내 학원을 차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개인레슨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학생을 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니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재학 중에도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짬을 내서 개인레슨을 했지만 그때는 학교 근처에서 소개받아서 했던 거고. 이제 내 지역에서 내 힘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난 아파트에 붙일 전단지를 만들었다. 우리 집 근처에서 시작해 이동이 용이한 부근의 아파트에 비용을 지불하고 게시판에 레슨문의 전단지를 붙였다. 진짜 연락이 올까? 싶었던 걱정을 뒤로하고 문의 전화가 간간히 걸려왔다. 한건의 레슨도 하지 않던 상황이지만 상담 전화가 걸려오면 한가해 보이지 않으려고 스케줄 확인 후 연락 드린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걸 때는 스케줄을 최대한 조정하면 가능한 시간이 이때, 이때밖에 없는데 혹시 가능하시냐고 다시 되물었다. 상담 전화를 한 학부모님은 거의 내 스케줄에 무조건 맞추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고 상담이 끝나면 레슨으로 확정되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이런 스킬은 어떻게 장착한 건지. 덕분에 난 떳떳하게 피아노 프리랜서 강사가 되었다. 처음 한두 명은 전단지 통해서 받았지만 그 이후로는 소개에 소개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진짜 더 이상 낼 시간이 없어서 몇 달씩 기다리게 하기도 했다. 처음엔 없어 보이지 않기 위해 애교 수준의 사기 스킬을 쓰긴 했지만 나중엔 레슨 잘하기로 소문난 강사가 되었다. 누구든 처음은 그런 거 아니겠는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피아노에 두각을 보이던 자폐아동을 맡아서 레슨 했던 일이다. 처음 시작은 1명이었는데 소개로 3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과 같은 방법으로 레슨을 할 수 없었지만 이 아이들의 천재성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가르쳐 주는 대로 하지 않고 고집불통의 모습도 있었고 레슨 하러 들어갔다가 아이들에게 맞는 상황도 종종 발생했다. 아픈 아이들을 온전히 품기엔 나도 아직 너무 어렸고 나름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대했지만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사랑으로 품어줄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은 성인이 되었을 텐데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고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주변 엄마들에게 소문이 잘 나더니 이번에는 피아노 학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들도 레슨 문의를 했다. 아이들 레슨법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것이다. 몇 년 전 나처럼 비전공자이지만 피아노 학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들 사이에 소문이 나면서 한동안은 선생님들을 위한 레슨이 확장되었고 음악 교육계에 일조를 하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난 그렇게 꿈에 그리던 피아노 전공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물론 막상 되어보니 꿈과 현실의 간극 때문에 현타가 오는 순간들도 많이 있지만 말이다.
포기했던 꿈. 스스로 다시 도전하고 이뤄냈다. 그것만으로도 참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