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커리어가 휘청대다
내 의지로 되지 않는 세상
잘 나가는 프리랜서 강사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업으로 삼으니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피아노 선생님들께 교습법을 레슨 하는 일도 나에겐 큰 행복이었다. 빼곡하게 짜여진 레슨 스케줄이 힘들 법도 한데 지치지도 않고 이 집 저 집 아이들을 만나러 다녔다. 이때부터 난 가르치는 일이 천직이라 생각했다. 계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난 쪼꼬미 아이들이 나를 만나고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가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꼈다. 자그마한 손으로 어려워도 열심히 하려고 하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몇 년 전 피아노 학원에서의 일률적이고 적당히 형식적인 레슨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던 난 새로운 아이를 맡게 되면 서점을 방문했다. 그 아이에게 꼭 필요한 맞춤형 교재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고심해서 고른 책으로 열심히 잘 따라와 주는 모습에 어릴 적 나의 모습이 떠올라 미소 짓곤 했다. 다만 아이들을 레슨 하는 일보다 엄마들과 상담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는 게 함정이다. 요즘도 일부 유난인 학부모님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선생님들이 참 많다. 예전엔 엄청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까다로운 엄마들을 위한 맞춤형 응대는 많은 훈련이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들 선생님으로서의 나를 존중해 주셨고 상냥하고 친절했다. 아이들 레슨을 하면서 느낀 건 부모님을 보면 아이의 모습이 예측되고 아이의 모습에서 부모님이 보였다. 외모가 닮은 것은 물론이고 말투나 성격, 성향 또한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아이들이 부모님의 영향을 정말 많이 받는구나라고 느꼈고 나도 우리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지?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유산을 선물로 받았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성실함 또한 물려받았으니 감사하다. 나도 아이를 낳으면 가정에서 잘 가르치고 양육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도피하듯 결혼을 해 버리다
한번 기울어진 가정 경제는 다시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프리랜서 강사로 제대로 자리 잡았지만 늘 경제적으로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보는 것이 힘이 들었다.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에 레슨이 없는 오전 시간에는 유치원에서 보조교사로 근무했다. 오후부터 밤까지는 레슨을 했고 주말에는 결혼식 오브리를 뛰었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시작한 교회 반주는 중, 고등부, 청년부를 거쳐서 장년부까지 이어졌다. 쉬는 날 없이 거의 풀로 일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지쳐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늘 쪼들리는 가정형편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결혼이야. 결혼을 해야겠어.'
그때당시 대학생 때 소개팅으로 만났던 지금의 남편과 연애 중이었고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에서 벗어나고자 난 결혼을 선택했다. 없으면 죽을 것마냥 엄청 열정적이게 뜨겁지도, 그렇다고 미적지근하지도 않은. 그냥 그렇고 그런 정도의 감정이었던 것 같다.
결혼만 하면 지금처럼 돈 걱정은 안 하고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일까. 합법적으로 집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던 것일까.. 난 그렇게 스물일곱이란 나이에 그 당시 내가 만나고 있던 남자와 결혼이란 걸 했다. 남편에게 교회를 다니겠다는 다짐을 받고 내가 시댁으로 들어가면서 우리의 신혼생활은 시작되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상견례를 하고 여느 커플들처럼 결혼준비라는 것도 했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모든 행위들은 평범하게 다른 커플들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내 기저에는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던것 같다. 시간이 흐른 후 그때 내 마음이 그랬구나..란 생각이 들었을 뿐. 어리석게도 그 당시엔 그런 나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도 못했다. 신혼 초. 도피처라고 생각했던 결혼 생활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빵빵 터졌다. 그렇다.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신세계. 대환장 파티가 시작된 것이다.
인생.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 한 개도 없구나
서로의 동의하에 그 어렵다는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시부모님과 아가씨가 살고 있던 집에 내가 들어간 것이다. 시댁은 양반가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권씨집안이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내력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결혼 전 우리 집에서는 전혀 없던 모습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사는 게 빡빡해서였는지 너네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이랬어 저랬어식의 임씨 가문의 내력을 전해주신적이 거의 없다.
결혼을 하고 난 매일 풀로 짜여있는 레슨 스케줄을 대거 정리했다. 신혼생활을 안산에서 시작했는데 기존에는 광명에서 일을 했기에 거리가 있어서 일주일에 3일만 일 하는 스케줄로 변경했다. 일을 안 하는 날 집에 있을 때면 아버님과 남편, 아가씨는 출근을 하고 나는 어머님과 둘이 남겨졌다. 각자의 스케줄이 따로 생기지 않는 한 말이다. 우리 어머님은 이야기하시는걸 참 좋아하신다. 남편이 어릴 때는 어머님도 시부모님의 시할머니까지 모시며 농사까지 짓고 사셨다고 한다. 젊은 시절 부모님 모시고 고생한 덕분인지 아버님은 아들로는 셋째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유산을 좀 받았다고 했다. 살고 있는 집과 땅을 부모님을 모신 아들에게 물려주신 것이다. 젊은 시절 고생을 참 많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한결 나아졌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시는 어머님은 길게는 하루종일 나를 붙들고 이야기하실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난 레슨이 없는 날이었고 여전히 어머님과 나만 집에 남겨졌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시작된 어머님의 말씀은 자리를 옮겨가며 8시간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사람이 말이 많아지면 실수도 있는 법. 아니 어머님 입장에서는 실수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저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이니 말이다. 다만 결혼 전 남편에게 들어서 내가 알고 있던 것들과 어머님이 말씀하신 사실은 좀 달랐다는 게 문제다. 나는 그날 농협 정직원으로 알고 있던 남편이 120만원 급여를 받는 계약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안양의 모대학을 나왔다고 들었는데 지방에 있는 어느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냥 지방 어디라고만 하셨지 어느 대학이라고는 말씀을 안 해주셔서 난 지금도 정확한 사실은 모른다. 확인할수도 있었지만 더 묻고 싶지 않았다. 연애할 때 내가 들어서 알고 있던 정보들과 다른 사실들에 당황했다. 당황해하는 나를 보며 어머님도 적잖게 당황하시는 눈치였다. 그에 대한 표현으로 "내 아들 무시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비록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지만 곧 시험 봐서 정직원이 될 거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택시를 사주든 피아노 학원을 차려주든 너희들 먹고살게끔은 해주겠다. 그러니 내 아들 무시하지 말아라. 는 말씀이었다. 무시할 생각도 그렇게 행동한 것도 아니었지만 적잖게 당황하는 나를 보며 엄포를 놓으시던 어머님이 참 어렵게 느껴졌다. 씁쓸했다. 사실을 알게 되어 그렇기도 했지만 당사자가 아닌 어머님께 듣게 되었다는 것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남편 퇴근 후 왜 거짓말을 했냐고 물었고 잘 보이고 싶었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더 할 말이 없어서 아니, 하고싶지 않아서 난 입을 닫았고 그냥 그렇게 일단락되는듯했다.
뜻하지 않게 멀티플레이어가 되다
남편은 월급을 받으면 차포떼고 남은 돈을 나에게 가져왔다. 처음 받은 생활비는 26만 3천 원이었다. 3천 원은 뭐지? 아무튼 결혼 후 처음 받은 소산이었기에 전부 감사헌금으로 드렸다.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십일조 같은 느낌에 좀 슬프긴 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뒤로 하고 감사함으로 드렸다. 그 후로도 남편은 본인 쓸 거 쓰고 남은 돈을 가져왔기에 20만원, 30만원 매달 금액이 바뀌었다. 문제는 돈이 없다며 20만원을 가져온 달은 30만원을, 30만원을 가져온 달은 50만원을 나에게서 가져갔다. 나는 레슨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남편보다 소득이 더 많았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남편의 행동은 나를 답답하게 했다. 결혼 후 한 달 만에 첫째 아이를 임신 했고 남편이 가져오는 생활비는 오히려 마이너스였기에 난 막달까지 계속 레슨을 했다. 만삭에도 운전하고 늦은 밤까지 일을 해야 했고 출산 후엔 두 달여 산후조리를 하고 바로 복귀했다.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를 출산하고 나니 이젠 몸도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를 낳고 바로 분가를 했고 친정 옆 광명으로 이사했다. 아이를 엄마께 맡기고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내 시간은 온전히 내가 쓸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다.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갓난쟁이를 두고 일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행인 건 나에게 첫아이인 큰딸은 양쪽 집안의 첫 손주이기도 해서 이쁨을 참 많이 받았다. 부모님께서도 힘들긴 하셨겠지만 첫 손주를 너무 예뻐하셨고 내가 일을 하는 동안 정성껏 돌봐주셨다. 벗어나고 싶어서 도망치듯 결혼이란 걸 했는데.. 부모님 옆에서 도움 받으며 일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며 '대체 뭐지..'싶었지만 살아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남편은 농협은 아니지만 새마을금고 정직원이 되었다. 하지만 월급을 가져오는 패턴은 변함 없었다.20만원, 30원씩 가져오고 준 돈 보다 더 가져가는 남편이 원망스러워 이렇게 가져올 거면 가져오지 말라고 했더니. 그 말은 또. 왜 그렇게 잘 듣는 건지.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난 현금으로 생활비를 받아본 적이 없다. 얄궂게 카드 한 장만 내 손에 쥐어줬을 뿐. 레슨도 반주도 주말 오브리도 예전처럼 했고 거기에 육아와 살림까지 추가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원하든 원치 안 든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구나. 매일매일 실감했고 뜻하지 않은 변수들은 계속 튀어나왔다.
셋째 출산과 동시에 전업주부가 되다
첫째 아이 출산 후 터울 많이 두지 않고 둘째를 낳고 싶었다. 그래서 계획하에 둘째를 임신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좀 큰 사고가 나면서 유산을 하게 되었고 100일 정도 병원 생활을 했다. 산후조리 기간을 제외하고 내 인생 유일하게 일을 하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비록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있었지만 말이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둘째를 빨리 가지는 게 몸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고 하셨고 1년 후쯤 둘째를 출산했다.
첫째와 3살 터울인 둘째를 출산하니 한 명과 두 명은 2배 차이가 아닌 몇 배의 힘듦으로 다가왔다. 그 와중에도 일은 계속해야 하니 부모님께는 너무 죄송했고 내 몸은 너덜너덜 해졌다. 둘째가 네 살이 되던 해 계획에 없던 셋째가 찾아왔다. 지금은 너무나도 소중한 녀석인데 조금 미안하긴 하네. 둘째를 유치원에 보내고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고 생각했던 나도 적잖게 당황을 했지만 엄마께 셋째 소식을 전하니 이제 더 이상 아이는 못 봐주시겠다고 하셨다. 축하를 기대했던건 아니지만 내심 서운하긴 했다. 하지만 둘째까지 돌봐주시며 워낙 힘드셨기에 나도 염치가 없고 죄송했다. 셋째 출산하는 막달까지 일을 했고 출산 전 레슨을 정리했다. 셋째 출산과 동시에 전업주부가 된 것이다. 이전에도 레슨이 없는 날은 육아와 살림에 열과 성을 다했지만 이젠 정말 전업주부라니. 실감이 안 나기도 했고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혼 전 내가 힘들어하고 답답해 했던 사안들이 떠오르며 뭐 그 정도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결혼 후 펼쳐지는 내 삶들이 녹록지 않았다는 말이겠지. 애든 어른이든 사는 건 참 고단한 일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