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 퇴사 후 다양한 경험들
열아홉에 시작된 나의 첫 직장생활은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또래 집단에서의 생활이 익숙했던 내가 어른들만의 리그에 들어와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행인 건 전산고등학교를 다녔기에 업무에 사용하는 컴퓨터 활용 능력은 제법 인정받았다. 밴드부 덕분에 고등학교 때 정신 차리고 공부도 하고 실습도 열심히 한 덕분이었다. 베테랑 선배들인 어른들께 칭찬받으니 괜스레 우쭐해졌다. 어쩌면 까마득히 어린 녀석이 아등바등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워 격려의 멘트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떤가 서툴기 짝이 없던 사회 초년생 신분인 내가 기죽어 다니지 않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마른 체형의 보통 키의 소유자 사장님은 말수가 워낙 적으셨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 술술 말씀하셨고 그 덕분에 퇴근 후 저녁식사와 함께 반주를 즐기시는 일이 잦았다. 직원 모두가 함께할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사장님과 언니(대리님이지만 나는 언니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와 나 이렇게 셋이 식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와 해산물을 좋아하셨던 사장님 덕분에 회를 먹을 때는 청주를 곁들이는 게 깔끔하고 뒤끝도 없다는 사실을 주입식으로 알게 되었다. 추운 날씨에는 마포 뒷골목에 있는 투다리에서 꼬치와 뜨끈한 정종을 한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모태신앙이었는데 이때 사장님 덕분에 뜨끈한 정종을 맛보게 되었다. 그 덕분에 집에 오는 좌석버스 안에서 곯아떨어지곤 했다. 날씨는 춥지, 차 안은 따뜻하지, 정종은 온몸을 녹아내리게 하지.. 술을 데워 먹으면 쉽게 맛이 간다는 사실을 이때 제대로 알아버렸다. 여기서 오해는 금물! 부어라 마셔라 수준이 아닌 겨우 반잔 정도의 양이었다.
어린 나이였기에 회사 돌아가는 사정은 잘 몰랐지만 어느 날부턴가 사장님 신경이 늘 곤두서 있었다. 나를 제외한 상사들은 수시로 사장님의 화받이가 되곤 했다. 나는 그저 눈치만 볼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도 잠시. 회사 사정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지 한동안의 살벌함을 깨고 사장님은 다시 예전의 컨디션으로 돌아오셨다.
그즈음 예전과는 다르게 사무실에 손님들이 자주 찾아오셨다. 이상한 건 우리 회사에서는 유형의 물건은 팔고 있지 않았는데 손님들이 와서 카드결제를 했다. 우연인지 그 무렵 은행 심부름을 자주가게 되었고 예전과는 다르게 항상 현금 인출 심부름이 주된 업무가 되었다. 한 달여쯤 돌아가는 상황을 관찰해 보니 사무실에 찾아오는 손님이 카드 결제를 하면 언니는 현금봉투를 내밀었다. 말단 직원이었던 나에게 그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난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며칠 더 지켜보다가 상의할 곳도 없었던 난 퇴근 후 아빠께 상황을 말씀드렸다. 아빠를 통해 우리 회사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카드깡이라는 불법 행위라는 걸 듣게 되었다. 아무리 심부름이지만 크리스천으로서 불법 행위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회사를 나왔다. 스무 살 4월 무렵 난 나의 첫 직장을 잃게 되었다.
그 무렵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베프가 안양에 있는 OOO페인트 본사에 다니고 있었고 친구의 소개로 같은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워낙 붙임성도 좋고 적응력 200%인 친구는 인사팀분들과도 잘 소통했던 모양이다. 마침 여직원 TO가 있었고 소개를 통해 면접을 보고 낙하산 느낌이긴 했지만 OOO페인트 정직원으로 잘 안착했다. 제조업 특성상 남자 직원이 월등히 많았고 인사팀과 총무팀을 제외한 모든 팀들은 여직원이 1-2명 정도였다. 내가 근무했던 팀은 기술팀이었고 여직원은 나 혼자였다. 5명이 내근을 했던 첫 직장에 비해 우리 팀 인원만 10명이 넘었으니 회사 전체 규모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컸다. 팀 내에 여직원이 혼자였기에 이쁨도 많이 받았고 일도 똑소리 나게 한다고 인정받고 다닐 수 있었다.
팀 내 나의 포지션은 페인트 배합을 전산화시키는 작업이 주된 업무였다. 그리고 팀이 돌아가기 위한 회계업무와 거래처에 제출할 보고서 작성 등의 업무를 맡았다. 여직원이 혼자였기에 이쁨도 많이 받았지만 잔잔한 잡무도 솔찮게 있었다. 그래도 팀 내에 입사가 비슷한 남자 직원 2명이 있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6살. 7살 더 많았지만 나를 동기처럼 대해주며 잘 챙겨주었고 힘든 업무도 많이 도와주셨다. 남자들만 드글드글한 소굴에서 혼자 살아남으려면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냐고 하시며 도와주셨다. 물론 이분들 말고 팀 내 모든 남자직원들 모두 너무 잘해주셨다. 내 앞전 선임은 10년 차 넘게 근무한 베테랑 언니였는데 아무래도 비유 맞추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애송이였던 내가 후임으로 왔으니 그분들의 마음도 이해가 될 것 같다. 실수만 빼고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런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려받고 존중받으면서 일했던 기억이다.
회사의 규모가 크다 보니 직원 복지도 좋았고 여직원회 모임도 주기적으로 있었다. 맛있는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명목상 회의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회사 내에는 다양한 동호회가 있었는데 나는 합창 동호회에 들어갔다. 당시 노조위원장님이 합창 동호회 회장이었고 우리는 매주 정해진 요일에 노조사무실에서 노래 연습을 하며 친목을 도모했다. 음악이 좋아서 찾은 동호회에서 나는 피아노 반주를 맡게 되었다. 비록 피아노 전공자의 길을 걷진 못했지만 고등학교 때도 직장에서도 피아노 반주를 하게 된 점이 참 신기하기도 했고 뿌듯했다. 동호회의 대표적 활동 중 하나는 주기적인 고아원 봉사였다. 확실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사랑의 집'이었던 것 같고 우리는 주기적으로 그곳을 방문해 아이들과 함께 노래하고 놀기도 했고 환경미화도 도왔다. 사회 초년생이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뜻깊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내심 뿌듯했다. 2년 동안 힘든 점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있는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2년 차 되던 해 어느 날 출근을 하는데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제조업 기반의 회사라 1,2 단지로 나뉘어져 있고 굉장히 넓었는데 사무실까지 걸어오는 내내 평소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긴장스러운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나의 동기뻘 남자직원이 사내게시판을 확인해 보라고 살짝 귀띔해 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사내 게시판 확인하니 명예퇴직자 신청을 받는다는 공지사항이 올라와 있었다. 신청자들은 퇴직금과 함께 몇 개월치(확실한 개월수가 생각이 안 난다.) 급여를 추가로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큰 불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회사 생활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팀장님께서는 팀 내에 한 명뿐인 여직원이 제출한 명예퇴직 신청서에 적잖게 당황하셨다. 내 자리는 업무의 특성상 내가 퇴사를 하게 되면 새로운 직원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었던 거다. 팀장님께서는 다시 생각해 보라고 반려 처리하셨지만 무슨 똥고집이었는지 내 의견을 밀어붙이며 퇴사를 감행했다. 어린 마음에 퇴직금과 몇 개월 치 급여인 위로금을 목돈으로 받을 수 있는 건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 추후에 더 어려워지면 위로금도 없이 회사에서 쫓겨날 수도 있을 거란 염려도 한몫했다. 그 정도로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전국적으로 우리 회사와 같은 일들이 무수히 벌어졌고 수많은 회사들이 부도가 났다. 날마다 뉴스에서 경제적 위험을 떠들어댔고 전 국민은 꽁꽁 숨겨두었던 금붙이들을 다 들고 나와 현금화시켰다. 그렇다. 바닥난 나라 경제를 어떻게든 끌어올리고 나라의 부채를 줄이고자 자발적 금 모으기 운동까지 했던.. 그래서 온 나라에 있는 금의 씨를 말린 대단한 사건이 일어났던 1997년. 그 이름도 유명한 IMF 사태였다.
팀장님과 팀원분들의 만류도 뒤로한 채 난 퇴직금과 위로금을 받고 퇴사를 했고 2년 만에 다시 백수가 되었다. 2년 동안 직장에 다니며 받은 급여는 용돈을 제외하고 엄마가 관리해 주셨다. 백수가 되었다고 성인 된 도리로 집에 손 벌리 기는 싫었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적금을 좀 달라고 말씀드렸다. 엄마께서는 미안해하시며 모아둔 돈이 없다고 하셨다. 미성년 시절부터 친구들 다 가는 대학도 포기하며 벌어온 돈이었는데.. 하나도 없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은 항상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더 낙후된 지역, 더 좁은 집으로 이사도 여러 번 다녔고 그로 인해 난 꿈도 포기했는데.. 꿈도 포기한 채 힘들게 벌어온 돈은 이미 우리 집 생활비로 다 쓰인 것이다. 그 당시 오빠는 대학에 갔으니 등록금에도 보탰으리라 추측해 본다. 나만 희생해야 하고 손해 봐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고 억울했고 눈물만 났다. 어린 마음에 더 화가 났던 건 아무리 어렵고 급해도 그렇지 나에게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다 써버렸다는 게 너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원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거리에 꽂힌 벼룩시장을 들고 들어와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 선생님을 모신다는 구인광고가 눈에 띄었다. 다시 피아노를 접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면접을 봤고 비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학원 선생님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동네 피아노 학원들은 페이가 비싼 전공자들은 엄두도 못 내고 비전공자이지만 피아노 실력이 좋은 선생님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