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어쩌다 직장인 같은 게 되다.
조금 이른 직장인 신분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소녀
어린 시절의 난 피아니스트를 꿈꾸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어느 해 겨울. 성탄 발표회 준비를 위해 매일매일 교회에 갔다. 노래를 하고 율동을 하는데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는 피아노를 쳤다. 어린 나이에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쉬는 시간이 되면 언니 뒤에 서서 어깨너머로 피아노 치는 모습을 유심히 보면서 눈으로 익혔다. 언니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나는 잽싸게 앉아서 언니의 피아노 연주를 따라 했다. 단 한 번도 배우지 않았지만 열심히 눈으로 익혀서 따라 했다. 서툴긴 했지만 제법 비슷하게 치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그랬다. 어린 시절의 난 피아노를 한 번도 배운 적 없었지만 어깨너머 눈으로 익힌 연주를 그대로 재연해 낼 정도로 재능을 타고났다. 워낙 소심하고 말수가 적었던 나였지만 피아노가 너무 배우고 싶어 용기 내어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꿍얼꿍얼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다고 답답해하시더니 말을 그렇게 들리지도 않게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며 웅변학원에 등록해 주셨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싶었는데 난데없이 웅변학원에 다니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목청이 터졌는지 지금도 의사소통과 전달력에는 문제가 없긴 하다. 웅변소녀가 되어갈 때쯤 난 다시 한번 피아노 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근데 부모님께서는 가기 싫다는 오빠는 피아노 학원에 보내고 난 주산학원에 보내주셨다. 분명 부모님의 깊은 뜻이 있었겠지만 두 번째 거절에 난 크게 실망하고 낙심했다. 종종 오빠를 따라가 오빠 대신 내가 연습하고 진도표 동그라미를 쳐준 기억이 있다. 오빠는 피아노에 흥미도 없고 엄청 귀찮아했다. '나나 보내주지..' 다시 부탁을 드려봐도 늦게 배우면 더 빨리 배운다고 들었다며 보내주지 않으셨다.
꿈은 꺾이고 좌절만 남다.
초등학교 6학년 생일. 드디어 난 소원하고 소원하던 피아노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부모님께서 6학년 생일선물로 집 앞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 주신 것이다. 피아노 학원의 문턱을 넘기까지 6년이나 걸렸기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나는 빠르게 진도를 나가기 시작했다. 등록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바이엘을 마스터하고 바로 체르니에 들어갔다. 학원 선생님들과 부모님께서는 평균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진도를 빼는 모습을 보며 놀라셨고 엄청 칭찬해 주셨다. 피아노 학원에서 살다시피 지냈다. 말수도 적은 아이가 내내 피아노만 열심히 쳐댔던 것이다. 중2 때부터는 교회에서 반주를 시작했고 피아노에 대한 열정은 계속 이어졌다. 중3 때 피아노 선생님께서 예고에 가려면 입시레슨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허락받아오라고 하셨다. 비록 늦게 시작해서 예중은 못 갔지만 예고에 갈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하지만 돌아온 건 피아노는 이제 그만 배우는 게 좋겠다는 답변이었다. 조금 있으면 오빠가 대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이 있으니 피아노는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피아노가 나의 전부라 생각했는데 오빠의 대입을 위해 내가 포기해야 했다. 어릴 때부터 오빠는 공부를 잘했지만 나는 피아노를 잘 쳤는데 왜 나만 희생해야 하는건지 억울했다. 난 공부는 따분하고 재미도 없는데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니 하긴 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공부를 하려니 머리가 돌아가줄 리 없었고 방에 처박혀 하이틴 로맨스 소설만 주구장창 읽어댔다. 피아노가 아니면 그 무엇도 상관없었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밴드부 덕분에 공부란걸 하게 되다.
공부엔 관심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다. 공부하는 방법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냥 안 했다. 더 최악인 건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면서는 피아노 뚜껑도 열지 않았다. 다 싫고 귀찮았다. 교회에서 반주만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고등학교엔 진학해야 하니 집 근처 인문계 고등학교에 원서를 썼다. 그때는 고입고사가 있던 시절이었고 시험을 보면 합격자 발표가 학교 정문에 붙었다. 여전히 공부는 뒷전이고 고입고사는 준비도 하지 않고 그냥 가서 시험을 봤다. 합격자 발표일 학교 정문에서 열심히 내 이름을 찾았다. 아뿔싸 근데 내 이름이 합격자가 아닌 예비합격자 명단에 있는 것이 아닌가. 예비합격 5명 중 1명이 나였다. 무슨 대입도 아닌 고입에 예비합격이라니.. 전혀 준비하지 않고 탱자탱자 놀기만 했던 지난 시간을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으리.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고 부모님께는 골칫덩어리 딸이 되었다. 그렇게 난 예고도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도 아닌 실업계 전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깨달았다. 다른 말썽은 1도 안 부리고 다만 공부 의욕이 없어서 하지 않았던 것뿐인데도 문제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교통편이 좋지 않아 통학이 2시간씩 걸렸지만 누굴 탓하리오. 다 내 탓이지. 새벽부터 일어나 등교준비를 했고 6시면 이미 스쿨버스에 몸을 싣었다. 나중엔 장거리 통학에 파김치가 되어 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우셨는지 등교 때는 아빠가 태워다 주셨다. 전산고등학교였기 때문에 프로그래밍과 전산 실무를 배웠다. 생각지 못하게 덕분에 이때부터 컴퓨터를 제대로 배우게 되었다. 학교 내에는 전국 고등부 부문 1,2위 실력의 밴드부가 있었다. 피아노에 대한 아쉬움을 여전히 맘 속에 품고 있었던지라 밴드부에 지원했다. 남은 악기자리는 트럼펫이었지만 음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 지원했다. 밴드부 담당 선생님은 무척 엄하셨고 음악 한다는 이유로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시험 성적이 상위 20%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밴드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약속 조항이 있었다. 나는 밴드부 트럼펫 주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상위 20% 안에 안착했다. 뒤늦게 공부하는 방법도 알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피아노를 마음에 품고 있던 나는 합창대회 때마다 반주로 실력을 뽐냈다. 피아노 덕분에 나를 추종하는 선후배에게 팬레터와 선물도 종종 받았다. 참고로 난 여고 출신이다.
남겨지고 싶지 않아 섣부른 결정을 하다.
밴드부에서의 생존을 위해 시작했던 공부 덕분에 고등학교 성적은 늘 상위 20% 안에 넉넉히 안착했다. 뒤늦게 공부하는 맛을 알게 된 게 좀 후회스럽긴 했지만 늦게나마 안게 어딘가 싶긴 했다.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건 아니지만 학업도 밴드부도 학교 생활도 다 열심히, 재미있게 즐겼다. 다행인 건 정보처리반이었는데 프로그래밍도 재미있었고 컴퓨터 다루는 것도 너무 흥미롭고 좋았다. 고3 여름이 지나고 2학기가 되니 취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교무실에는 기업들의 채용공고가 붙기 시작했고 상위권 학생들은 대기업, 증권사, 은행 순으로 취업을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담임선생님 추천서를 받아 들고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애기한 나이였는데.. 엄청 커 보이는 회사들과 빌딩 문턱을 넘으며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스스로 짠한 마음이 든다. 나름 네임밸류 있는 회사 몇 군데 면접을 봤는데 실력 부족이었는지 운이 없었던 건지 떨어졌다. 같은 반 친구들이 하나둘 취업이 되었다고 학교에 나오지 않고 출근을 했다. 친구들의 빈자리가 늘어갈수록 점점 조바심이 났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기에 조금 더 기다리면 조금 더 좋은 회사들도 채용공고가 뜰 거라는 선생님의 조언을 뒤로한 채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회사에 면접을 봤다. 마포에 있는 아웃소싱 회사였다. 지금은 아웃소싱업체라고 하지만 그때 당시엔 그냥 인력하청업체라고 불렸다. 보통은 1차 서류전형에 합격하면 2차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는데 이곳은 서류전형과 면접을 한날 진행했다. 물론 면접자도 나 혼자였고 결론이 예측 가능하겠지만 OO시스템(주)라는 회사에 최종 합격하게 되었다.
열아홉. 어쩌다 직장인 같은 게 되다.
내 나이 열아홉. 난 그렇게 첫 직장을 얻게 되었다. 첫 출근을 해보니 전사 직원이 사장님, 과장님, 대리님, 비서 겸 경리를 맡고 있는 대리님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이었다. 대기업까지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또 단출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튼 고3이었던 열아홉 10월 나의 첫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난 광명에 살고 있었고 마포까지 한 번에 가는 일반 버스 편이 없어서 주로 좌석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여의도공원이 생기기 전 그곳에서 롤러스케이트도 타고 자전거도 타며 친구들과 놀았는데.. 출퇴근 길 버스를 타고 그곳을 지날 때면 나는 아직 어린것 같은데 왜 사회의 쓴맛을 보고 있나 싶은 게 괜스레 서글펐다. 10월에 취업을 나갔기 때문에 겨울을 지내면서 몸도 마음도 더 추웠던 모양이다. 버스가 여의도를 지나 마포대교를 건너면 나의 첫 직장이 있는 곳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높은 빌딩들. 그 속에선 칸칸이 크고 작은 회사들이 운영되고 있었다. 인력회사였기에 본사에는 5명이 근무하고 있었지만 우리 회사 소속 직원들을 다양한 곳으로 파견 보내는 일들이 주로 이루어졌다. 파견직원까지 합한 전 직원이 몇 명 정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간간히 사무실로 걸려오는 전화로 목소리로만 인사하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매달 급여일이 되면 직원 급여리스트를 뽑아 들고 은행에 가서 입금처리를 했다. 인력회사였기 때문에 4대 보험 취득, 상실 신고도 잦았다. 건강보험 공단을 엄청 드나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꼴랑 고3이었던 내가 그게 뭔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니 취득, 상실 신고차 다녔던 것 같다. 총무팀 대리님(회사에서 유일한 여성동지 언니였다.)이 서류 준비해서 다녀오라고 하면 심부름 다니는 수준이었으니 무슨 일인지는 알리가 없었다. 그래도 워낙 눈치도 있고 빠릿빠릿한 성향이라 시키는 건 그 누구보다도 잘했다. 뼛속까지 I인지라 애교 부리며 살갑게 대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눈치껏 분위기 맞추며 막내의 자리를 잘 지켰다. 열아홉. 난 그렇게 그렇게 어쩌다 직장인 같은 게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