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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Aug 27. 2021

서른셋, 나는 여전히 얼버무린다.

나는 무엇이 될 상이란 말이오!

스물셋, 나는 서울의 작은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얼굴 뵙기가 하늘에 별 따듯 어려운 사장님이 아르바이트생들 옆을 기웃대기 시작했다. 저기서는 서울대생답게 일을 잘한다는 칭찬, 여기와 서는 법학과가 아주 잘 어울린다는 덕담을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던지던 사장님 사장님, 우리 사장님. 사장님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무슨 학과인가?"

"무역학과요."

"오, 아냐 아냐. 무역사무 할 얼굴이 아니야."

"네? 그럼 뭐를.."

사장님은 그걸 왜 내게 묻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 글쎄, 쨌든 무역 쪽은 아닌 것 같은데..그쪽 일할 생각인가?"

"네? 그건 아닌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사장님은 과연 관상을 볼 줄 아셨던 겐가!

스물넷, 나는 뜬금없이 편집디자인 일을 배우고 싶어 고용노동부에 찾아갔다. 하지만, 편집일은 노력에 비해 돈이 안 되고, 여자는 회계를 배워 놓으면 평생 써먹을 수 있다는 상담사분의 말에 홀라당 넘어간 나는 전산회계학원에 턱! 하니 등록증을 내밀었다. 회계학과에서 무역학과로 전과를 했던 과거의 나를 잊은 채.


공부를 하면서도 재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더니 전산회계 2급에 합격했다. 그 후, 회계 업무로 취업을 했다. 그러나, 회계업무와 함께 극심한 민원업무에도 시달렸던 나는 사람에 질릴 대로 질렸다. 그래서 혼자 입을 닫고 일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싶었다.


그때, 우연히 지하철 칸에서 발견한 '속기사' 광고. 그 길로 나는 연차를 내고 학원에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며칠 뒤, 200만 원을 웃도는 속기기계를 구매했다. 꽤 큰 지출이었기에, 회사를 퇴사하지 않고 주경야독 시스템으로 몇 달을 보낸 뒤에야 퇴사를 하고 공부에만 매진했다.


얼마 후, 3급에 합격했다. 학원에서는 자막방송 속기사로 추천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지방 의회 속기사가 되고 싶어 공무원 준비를 했다. 1년 정도 했을까. 퇴직금을 까먹고, 합격은 하지 못했다. 이제는 돈이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잔고가 바닥을 치니, 자존감도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결국, 다시 회계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 나는 회계와는 절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는 반년만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마지막 날,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회계사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이러고 또다시 돌아오는 거 아냐?"

"아, 회계사님. 저 진짜 이제 이쪽으로 절대! 절대! 안 올 거예요. 진짜로."


제가 이 바닥에 다시 오면 성을 갈겠습니다!라는 각오로 패기 있게 나왔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길로 돌아가고 말았다. 빨리 돈을 벌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그 짓을 반복했을까. 출근한 지 반나절만에 퇴사를 했던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숨죽여 울었다. 이 정도면 회사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겠구나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없을까? 엉엉 울다가 울며 겨자 먹기로 작은 협회의 계약직에 지원했다. 돈도 적고, 기간도 적은 계약직에 불과했지만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unplash@Luis Villasmil

그때부터였나. 인생이 재미있게 꼬이기 시작한 것이. 계약이 만료되었지만 협회의 인연으로 컴퓨터 강사일을 시작했다가, 코로나가 터졌고, 다시 구직자가 되었다가 면접에서 크게 데었다. 다시 원점이었다.


서른둘, 그제야 나는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하기 싫고, 할 수 없고, 도저히 할 자신이 없는 일들을 생각해봤다. 몇 번의 헛스윙을 던진 덕에, 이번에는 쉽게 나를 파악할 수 있었다.


피해야 할 일: 회계, 중간관리자의 일, 정적인 일, 전화, 민원 업무

잘할 수 있는 일: 혼자 가만히 하는 일, 창의적인 일

회사 규모: 대규모 <소규모

가치: 돈은 많으나 몸과 마음이 힘든 일<<<<<<<돈이 적어도 보람 인 일


이렇게 정리를 해보니 조금씩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무언가가 되고 싶다기보다, 글을 잘 쓰는 것을 배우고 싶었다. 또한 회사에 속하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보고 싶었다. 이때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배우기 시작했다.


웹소설을 배웠다. 전자책을 만들고, 블로그로 애드포스트 수익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유튜브 작가가 되고, 글을 쓰니 소설에도 관심이 생겨 초단편소설쓰기 수업도 들었다. 4월부터는 상품등록 알바를 시작하고, 유튜브 편집자일을  계기로 콘티 작가로 돈을 꾸준히 벌다가, 브런치에 글을 꾸준히 올린 덕에 공모전에 당선되고, 연애상담 어플의 상담사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돈을 미친 듯이 벌어야지! 하는 생각을 조금 내려놓으니 돈이 되는 것들이 내게 자석처럼 탁 달라붙기 시작했다.

회사로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메모장에 글을 쓰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는 쓰리잡으로 산 적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힘들지도, 쉽게 지치지도 않았다.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확신 덕분이었다.



땀이 뻘뻘 흐르는 여름이 돌아오면, 그 시절 그 언니가 떠오른다. 법대를 자퇴하고, 지금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 중이라고 말하던 언니. 법전을 보는 대신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던 언니. 아르바이트비를 타면 우쿨렐레를 사서 혼자 보라카이 해변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싶다고 했던 언니. 그게 올해의 꿈이라고 말했던 언니. 그리고 며칠 뒤, 보라카이 티켓을 끊었다고 자랑했던 언니.


늘 조급함에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던 나와 달리, 언니는 늘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이제야 알았다. 언니가 행복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언니는 보라카이 해변에 앉아 우쿨렐레를 연주한 뒤 또 어떤 꿈이 생겼을까?


서른셋,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나는 여전히 얼버무린다.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요, 전문적인 프리랜서도 아니기 때문인데, 하지만 이런 의문을 항상 친구처럼 옆에 두고  살 작정이다. 하나의 직업으로 정의되는 삶 대신, 내게는 다양한 카테고리로 표현할 수 있는 삶이 주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믿으며. 'ㅇㅇ가 될 상이오'의 알맞은 것들을 채워 넣는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매거진의 끝을 쉽게 맺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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