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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Mar 11. 2022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하니까.

침대에서 출근하는 싸이언스 걸

그 시절 4월, 과학의 달을 기념하여 고무동력기를 만들 때면 나는 공상에 빠져 한 달을 보냈다. 내가 어른이 될 때면 고통 없이 이이를 낳을 수 있지 않을까, 비행기가 아니어도 각자의 가구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 말이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침대 좀 타고 다니면 너무 좋겠다, 그럼 정말 좋겠다..라고 생각하기를 수천번.



그리고

정확히 22년이 지났다.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유독 에너지가 없던 나는 유난히 누워있는 것을 좋아했다. 20대가 되고 직장에 들어갔다. 안 그래도 없던 에너지는 지하철에서, 회사에서 이미 끝나버렸고, 집에 있을 때면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다. 가장 많이 웃었던 것도, 울다가 콧물을 흘린 곳도 바로 침대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제발 수입이 1/3로 줄어도 좋으니 침대에서 안 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에서 누워서 일을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 정도는 공상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일 아닌가? 이제는 어느 정도 현실적인 상상을 하는 30대가 되었다.


백수가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이것저것 사부작사부작 바쁘게 지내지만 사람들은 그런 내게 물었다. "그래서 직업은?" 물론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들은 많이 없었지만,  마주치게 되는 이런 질문을 들을 때면 나는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 그러니까,  직업은 뭐라 해야 하지? 그러다 문득  생각, 아니  직업이 있어야 하나?



백수들의 놀이터, 니트 컴퍼니

(니트족: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신조어)


https://youtu.be/Khq0 gnpc6 tE


때마침, 알고리즘은 나에게 "니트 컴퍼니"를 보여주었고, "뭐라도 되겠지"라는 사훈명을 보자마자 홀린 듯이 입사지원 버튼을 눌렀다. 입사 절차는 신박했다. 입사자가 운영진에게 거꾸로 질문을 하는 거꾸로 면접(참여하지는 못했다), 니트 컴퍼니의 회사 생활을 알려주는 OT 시간까지 가지니 점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나, 정말 회사에 들어가는 것 같은데?


3월 7일 월요일 오전 8시. 회사에 다녀오겠다는 남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남편도 첫 출근, 나도 첫 출근하는 역사적인 오늘. 9시쯤 눈곱을 떼고 회사에 출근했다. 그것도 무려 침대에 누워서 말이다!



느려도 괜찮아, 출근은 하니까

사무실: 네이버 밴드

업무시간: 9-6시


니트 컴퍼니의 사원들은 네이버 밴드 대화창으로 소통, 아니 일을 한다. 9시부터 출근이 가능한데 만약 12시 이전까지 출근 인증을 하지 않으면, 팀장님이 ㅇㅇ,ㅇㅇ씨 얼른 출근해주세요!라는 메시지의 압박을 받기도 한다. 또한, 내가 정한 업무를 모두 완료하였다면 조기 퇴근도, 그리고 당일 월차도 가능한 유연한 조직!


사무실(밴드)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업무를 인증한다. 동네 산책하기, 강의 듣기, 그림 그리기, 글쓰기, 이력서 제출하기, 영양제 챙겨 먹기, 사진 찍기, 운동하기 등등.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이 니트 컴퍼니에서는 중요한 업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또한,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다.


업무보고


나는 아이패드 드로잉 업무로 정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스타툰 작가에 도전 중이다. 인스타툰이란, 인스타그램에 연재하는 가벼운 웹툰인데 그림 실력이라고는 보잘것없는 나였기에 인스타툰에 도전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니트 컴퍼니 동료들에게는 저 이거 하고 싶어요! 이거 하려고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마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한다 해도 응원해줄 사람들이라는 확신 때문이겠지. 함께 무업기간을 보내는 동료들은 어느새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5일째 연속 펜슬을 잡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건 정말 니트 컴퍼니 덕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움직이게 만드는 힘, 뭐라도 하자.

업무 인증이 끝나도 실시간으로 올리는 팀원들의 인증을 보면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침대 위에 퍼져있던 몸을 일으켜 카메라를 챙겨 집 앞 공원으로 나갔다. 몇 바퀴를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마침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테이블에 앉았다. 이 무해하고 행복한 시간을 카메라에 담으며 또 한 번 생각했다. 돈을 버는 행위를 해야지만, 내가 쓸모 있고 유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생각은 역시 잘 못 된 것이었음을.


니트 컴퍼니의 업무기간은 총 12주. 벌써 한 주가 지나가고 있다. 프로젝트의 업무가 종료되는 날, 나는 뭐라도 되어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설렌다. 아! 물론 뭐가 안 되어도 상관없다. 그런데 뭐라도 하니까 뭐라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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