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불화 속에서 자랐다. 술이 친구인 아버지. 여자는 3일에 한 번 패야 한다는 생각을 몸소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했던 그분은 자녀라고 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주지는 못하셨다. 그래서 나는 집이 싫었다.
결혼은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랑 대판 싸운 날,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 적령기에, 마침 곁에 남자 친구가 있었고, 그는 남편이 되었다.
그래도 행복한 결혼이었다. 나는 결혼식 날 방긋방긋 웃었다. 절대 울지 않으려고 행복한 생각만 했다. 지난날이 그지 같았고, 우리 엄마 매 맞고 눈탱이 밤탱이 되던 기억들의 마지막으로 엄마가 피를 쏟고 대장암 말기 선고를 받았어도, 나는 절대 울지 않았다. 울면 아버지한테 지는 것 같아서.
그렇게 입성한 결혼은 나에게 도피처가 아니었다. 결혼으로 지긋지긋한 부모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아버지의 폭압으로부터, 어머니의 인고로부터. 어쩌면 엄마는 나 때문에 아빠한테 그렇게 당하고 사는 거 아닐까. 내가 떠나면 엄마는 좀 자유로워질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는 폭압에 물든 사람이었다.
게다가 새로운 가족인 시댁이 생겼다. 시댁은 좋든 나쁘든 새로운 인간관계이며, 내가 너무 좋아해서 친해지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남편의 식구라서 친해져야만 하는 어떤 대상이다. 거부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그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그렇게 그 관계를 천천히 받아들였다.
다행히 홀 시어머님은 나의 속도를 이해해 주시고, 따뜻하게 품어주셨으며, 시누이는 나를 마치 여동생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뭐든 그렇게 챙겨주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됐다. 친절과 호의를 지혜롭게 잘 받아들이는 것도 처세였다.
결혼 생활의 가장 큰 적은 남편이었다.
결혼 전엔 서부의 총잡이처럼 고독의 길을 걷던 그가, 결혼 후에는 왜 효자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를 위해 더 애를 썼던 것도 같고. 또 한 편으로는 자기가 잘 지낼 때 엄마 생각이 나고 그랬나 보다. 그런 남편을 내 편으로 교육시키는 신혼 초기를 지나고 나니 최대 복병이 나타났다. 바로 아이.
아이는 뱃속에 있을 때가 가장 평화라는 것을, 나도 선배들처럼 낳고 나서 깨달았다. 그리고 목메단다는 아들 둘을 놓고, 나는 결혼을 자유와 도피로 생각했던 서른의 그날을 떠올렸다. 결혼은 결코 자유가 아니었고, 끝없는 구속이었으며, 나 스스로도 나를 구속한다. 엄마라는 타이틀로.
그나마 자유로웠던 시간들은 코로나 19로 인하여 모두 빼앗겼고, 경제 불황이라며 너도나도 취업에 알바에 사업에 뛰어드는 주변 엄마들을 보며 위기를 느끼다 문득 드는 생각. 결국 전업맘이든 워킹맘이든 그들의 선택은 결혼의 구속, 그 연장이다. 돈을 버는 이유도 가정을 지키는 이유도 모두 자녀와 가족을 위해서이니까.
결혼을 환상으로 생각해선 안 되는 이유다. 결혼이 현실인 이유다. 결혼은 결코 도피처가 될 수 없고,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크다. 꿀 같은 결혼 생활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