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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종훈 Sep 28. 2023

코페르니쿠스의 신발

'헤어질 결심'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한낱 물건에 지나지 않는 것들에게도 필요한 마음인 것인지 오래 동행(同行)한 것들 쉬이 버리지 못한다.




닳고 해져 너덜너덜 해진,

오 년여 전 이탈리아 볼로냐 노점(露店)에서

10유로 주고 산 검은 운동화.

그날, 코페르니쿠스 자취 어린 그곳 대학 들러

한참을 둘러보고는 나와

마조레(Maggiore) 광장(廣場) 한 구석 계단에 앉아

그간의 뜨뜻미지근했던 생(生)과

그 혁명적(革命的) 전환(轉換)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하다 어둑해져 숙소 돌아가던 중

파장(罷場) 무렵의 그곳 노점(露店) 지나게 된 것이었다.

길거리 가게야 우리나라나 그곳 별반 다를 바 없어

별생각 없이 매대(賣臺) 늘어놓은 갖은 물건

눈으로 훑어보며 지나다 신발 파는 곳 앞

잠시 멈춰 섰을 때

그때껏 보이지 않던 한 사내가

가게 옆 세워놓은 트럭 뒤에서 불쑥 나타나

흡사 무슨 감별이라도 하듯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다

생각도 못한 싸다, 거저다

서툰 한국어로 구매 권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살 의향 조금도 없어

노,노 손사래 치며 그냥 지나치려는데

삼성, 엘지, 굿굿 연발하며 엄지 치켜세우던

배불뚝이 중년 사내의 넉살에

안 사고는 못 배겼던 15유로

가격표 붙어있던 운동화.

피프틴 유로 노, 텐 유로 오케이? 내 제안에

오 마이 갓, 연발하며 고개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손은 그보다 빨라 이미 비닐봉지에 운동화 담고 있던

사내와의 유쾌했던 흥정의 기억.


쓰레기 봉지에 운동화 담아 버린다.

챠오(Ciao), 뒤돌아서 가는 내 등 뒤 대고 손 흔들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 거듭하던 이국(異國)의 사내.

그러나 지금은 아는 그 말 Ciao, 잘 가.

그날 이후 부지런히 쫓아다녔지만

그 어떤 전환(轉換)이나 혁명(革命) 일어나는 일 없이

삶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신발만 닳아버린.


Ciao, 먼 곳에서 온 나의 운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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