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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Jun 03. 2022

회사에서의 있어빌리티

   전인가 등장한 신조어 중에 ‘있어빌리티라는 단어가 있었다. 남들에게 실제보다  있어 보이게 하는 능력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허세의 의미가 강조되어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는 경우도  많았다. 있어빌리티에 대하여 뒤늦게 이야기해보자면 회사에서의  능력은 생각보다 가치가 있다. 똑같은 노력과 재료를 투입하더라도, 심지어 조금 덜한 노력과 재료를 투입하더라도 보여지는 결과물을   ‘있어블하게 만들  있다면 기획의 파급력이나 전달력은  높아진다. 한마디로  팔리는 기획서를 만들  있는 것이다. 굉장히 의외로 많은 C레벨의 임원들은 기획서의 초반의 한두  심지어 한두 단어에 포커싱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업력이  임원진의 경우 보고받는 내용의 대부분은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에서 일부만이 업데이트된, 그들에게  감흥이 없는 그런 정보들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Selling point  잡혀진 그런 ‘있어블 기획안을 가져온다면? 결국에는 최종 CEO에게 그럴싸한 보고를 해야 하는 입장인 그들에게는 포장이 이미 잘되어 재포장의 공수가 들지 않는 그런 보고서가 마음에   수밖에 없다.


포장의 달인


내가 한창 일을 배우던 신입사원 시절, 같은 팀 옆자리에 붙어서 함께 일했던 한 선배가 있었다. 뭘 모르는 내가 보더라도 폼나게 일을 잘하는 것 같은 그였다. 나한테는 항상 시큰둥한 팀장님도 그 선배한테만큼은 애정 어린 눈길을 담아 ‘우리 누구누구’라고 불러주던 위인이었다. 전반적으로 웬만한 일은 모두 다 잘하던 선배였지만, 그중에서도 그분의 특기는 보고서 작성이었다. 아직 대리 직급도 달지 않은 사원 말년 차였던 그 선배는 팀 내의 다른 대리 과장들을 제치고 팀의 모든 보고서 작성을 전담하게 되었다. 보고서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단어나 문장들을 참 기깔나게 쓰는 사람이었다. 이미 너무나 시간이 지나버려 그때 그 피와 땀이 담긴 보고서들이 이제는 쓸모없는 자료가 되어버렸지만, 지금도 노트북 구석의 먼지 쌓인 폴더 한켠에는 그 시절 그 선배가 만든 PPT들이 몇 개 남아 있다. 매번 파일 정리를 할 때마다 이제는 필요 없으니 지워버리자 싶다가도 한 번씩 열어볼 때마다 참 잘 만든 보고서라는 생각이 들어 아직도 지우지 못한 채 간직하고 있다.


 한 번은 팀장님이 그 선배에게 기존의 관리 방식을 개선하는 보고서를 만들어 오라고 시킨 적이 있었다. 나였으면 별생각 없이 ‘OO 개선안’, ‘OO 사업 개선의 건’과 같이 평이한 제목의 보고서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배가 만들어 낸 PPT는 제목부터 달랐다. OO사업 전략 Reboot 였다.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면 십여 년 전임을 고려해주시길) 지금도 내 기준엔 그리 촌스럽거나 outdated 하게 들리지 않는 제목인데 그 시절 그때에는 얼마나 있어 보였겠는가.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있어 보이는 말들을 보고서에 갖다 쓰는 거지? 궁금해진 나는 선배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선배는 이런 말들 어떻게 찾아요?’



 출근할  DBR 


선배는 짧게 대답했다. 출퇴근 시간에 DBR (동아비즈니스 리뷰)를 본단다. 그 후에 자세히 그 선배를 관찰하니 책상 한쪽에 항상 들고 다녀 구겨진 DBR이 놓여있었다. DBR을 구독해 출퇴근 길 지하철 안에서 휘리릭 읽고 필요한 단어나 쓸만한 구절이 있으면 보고서에 바로바로 써먹는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실용적으로 들리는 팁이었다. 몇 년 뒤 나도 보고서 작성을 전담하게 되었을 때 서점에서 DBR을 집어 들고 쓸만한 내용이 있는지 뒤적거리기도 했다. 비슷한 예로는 경제신문이나 잡지, 혹은 관련 도서를 읽는 것 등이 있다. 좋은 표현, 보고서에 쓰기 그럴싸한 말, 있어 보이는 단어들을 꾸준히 수집하면서 적시에 바로바로 사용할 수 있는 나만의 library를 만들어 놓는다면 그럴싸한 말들로 잘 포장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library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뭐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 귀찮음이 열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꾸준히 한 잡지를 정기 구독하여 정독하는 것은 나에게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왜 이렇게 어려운 내용이 많은지… 쓸만한 단어를 찾아내자면 잡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어야 할 텐데, 흥미 없는 분야의 긴 특집기사들을 읽고 있자니 5분에 한 번씩 딴짓을 하게 되곤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보고서 마감 시간은 찾아오고야 만다. 빈 PPT 화면만 멍하게 쳐다보다가 꼼수 아닌 꼼수를 생각해냈다. 다른 사람이 미리 잘 고르고 골라 놓은 키워드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팀에서 출시하는 신규 서비스의 기능 및 장점에 대한 문서를 작성한다고 해보자. 깊이 고민하지 않고도 물론 아래 정도의 문장은 바로 쓸 수 있을 것이다.


‘ 이 서비스는 고객사의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처리해줌으로써 관리 비용을 감소시킨다.’


이게 뭐야!라고 혼나지는 않겠지만 딱히  있어 보이는 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머리를 싸매도 그럴싸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높인다를 제고한다로 바꾸어볼까? 효과 대신 효율로?  머리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니 결국 거기서 거기다. 빠르게 포기하고 조용히 구글을 켠다. 영어로 내가 다루는 상품/서비스/사업 영역과 관련 있는 키워드를 치고  업무 영역을 다루는 회사를 찾는다. 회사의 사업 영역에 들어가 그들 업무의 의의와 목적을 확인한다. 컨설팅 회사의 자료들이 보통 괜찮은데, 컨설팅  특성상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자신들의 성과를 홍보하기 때문에 고급진 단어들이 자주 쓰인다. 완벽한 영어로 검색할 필요는 없고 적당한 단어의 조합이면 충분하다. 괜찮아 보이는 내용을 찾았다면 해당 내용을 파파고에 넣는다. 그럴싸한 단어의 조합을 차용해오거나 가끔 있어 보이는 영단어가 있을 경우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남의 소중한 자산을 그대로 도용하면  되니, 문장 전체를 따오는 일은 없도록 하자.


검색어
data management efficient save time  


찾은 키워드
Save money and time with efficient data management
Time is money
Well designed data governance program
Potential competitive advantages over their business partner
Solid approach to data management
Better business performance

이제 남은 일은 찾아낸 키워드들을 적당히 번역하거나 좋은 단어를 따와 보고서 중간중간에 붙이는 것뿐이다.


보기 좋은 떡이 잘 팔린다.

엄청나게 고민해서 정말 많은 내용이 담긴 보고서도 전달에 실패하면 결국 자기만의 만족으로 남을  있다. 회사에서 귀한  시간을 쏟은 일이 그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아까운 일이다. 내가 만든  기획서를 최대한 분칠하여  팔리게 만드는 것이 최소한의 노력으로 나를 어필할  있는 방법이다. 물론 내용이 완벽한 기획안을 만들  있다면 그것이 베스트임을 물론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은 단기간에 얻어지기 어려우며, 시간과 노력의 투입에 정비례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의 생각은 생각보다 비슷하다. 슬프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생각할  있는 아이디어는 대부분 남들도 생각할  있는 수준인 경우가 많. 평범한 보고서를 낑낑대며 붙잡고 있을 시간에 내용을    다시 읽어보고, 그럴싸한 말을 찾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강조하고 포장해보자. 물론 너무나 고급진 단어들의 향연으로 보고서 껍데기만 그럴싸한   강정이 되지 않게 기본적인 내용은 채워져야 함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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